그리니치를 품은 아일랜드 가든스 공원
아일 오브 독스(Isle of Dogs) 남쪽에는 템스 강 너머로 그리니치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아일랜드 가든스(Island Gardens)라 불리는 이 공원은 1895년에 만들어질 당시에 아일 오브 독스 내의 유일한 공원이었다. 물길을 따라 줄지어 선 대형 창고, 선박 건조와 수리를 위한 드라이 독(Dry dock), 제분 공장, 로프 공장, 목재 야적장,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배들, 오로지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업 단지에 휴식의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건 지역 주민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이 공원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아일랜드 가든스 공원은 그리니치의 역사 전인 건물들을 한 프레임 내에 담을 수 있는 장소이다. 공원의 크기는 작은 편이지만 강 너머의 전경은 그 어떠한 공원보다 멋진 풍경을 내어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화가들이 지금의 공원 부지에서 바라본 그리니치 전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2023년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강 너머의 그리니치 풍경은 1700년대에 묘사된 그림과 다를 것이 없다. 템즈 강에 떠있는 다양한 배들이 주는 분주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한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곳의 풍경만큼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오래된 필름 사진을 보는 듯한 깊은 향수에 잠기게 해 줄 장소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림의 주요 대상이 되는 그리니치 병원은 전쟁에서 부상당하거나 나이 든 선원들을 영국이 돌봐야 한다는 신념으로 설립되었다. 병원이 설립되던 17세기에는 여러 해전이 있었는데, 전쟁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선원들 중 형편이 넉넉지 않은 경우, 살기 위해 구걸을 해야 하는 경우가 흔했다. 1692년 5월 영국 해군이 <라 호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선원들에게 감명받은 메리 여왕은 해군 기지가 있는 포츠머스로 외과의사를 보내 그들을 치료하는 등 이들의 처우와 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메리 여왕은 재무부에 그리니치 병원 설립 허가 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하는 등 열정을 보이기도 했는데, 불행히도 그녀는 1694년 12월 천연두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병원이 설립되는 걸 보지는 못했다. 당시 왕이자 남편이었던 윌리엄 3세는 여왕만큼 그리니치 병원 설립에 대한 열의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그녀가 꿈꿨던 생전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병원 설립에 대한 왕실 헌장(일종의 허가증)을 발급했고, 헌장에 여왕의 이름이 포함될 수 있도록 그녀가 살아있던 시기로 문서를 작성해 그녀의 유지를 이어 나갔다. 병원의 설립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나이, 상처 또는 기타 장애로 인해 더 이상 복무할 수 없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는 영국 해군 소속 선박 및 함정에서 복무했던 선원들을 구호하고 지원한다.
그리니치 병원은 현대의 병원보다는 요양원, 양로원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리니치 병원에서 생활하는 참전 군인들은 환자가 아닌 그리니치 연금 수급자(Greenwich Pensioner)로 불렸다. 이들에게는 선원들처럼 제복과, 모자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그리니치에서는 위 그림에 묘사된 복장의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들을 묘사한 그림에는 항상 지팡이, 의족, 의수, 제복, 삼각형 모자, 파이프 담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다.
아일랜드 가든스에는 경치를 제외하고도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템즈 강 아래로 그리니치와 아일 오브 독스를 이어주는 그리니치 도보 터널(Greenwich Foot Turnnel)이다. 런던의 지하철인 튜브의 보행로 버전이라고 설명한다면 충분한 비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이 지하 터널로 내려가는 북측 출입구 중 하나가 아일랜드 가든스 공원 내에 있다.
터널은 1902년 완공되었고, 주로 그리니치에서 아일 오브 독스의 부두나 조선서와 같은 사업장으로 출근하는 근로자들이 이용을 했다. 터널이 완공되기 전에는 페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는데, 안개가 심한 경우에는 지연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터널의 완공은 두 지역을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페리와 달리 이용료가 없었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교통비 걱정도 덜 수 있었다. 다만 터널의 완공으로 인해 이 구간을 운행하던 페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일터를 잃은 페리 운영자들에게는 상당한 보상금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그리니치 도보 터널의 총길이는 370미터이고, 템즈 강바닥으로 15미터 아래에 위치해 있다. 터널의 굴착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작업자들이 밤낮으로 8시간 교대 근무를 하며 24시간마다 약 3피트씩 땅을 파냈다. 터널 내부는 20만 개의 흰색 타일로 마감이 되어있다. 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아일랜드 가든스 쪽의 터널 구간이 손상되어, 이 구간을 보수하기 위해 두꺼운 강철이 현재까지 덧대어져 있다. 위 그림의 SHAFT라고 쓰인 출입구에는 건설 당시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었다. 나선형 계단이 감싸고 있는 중앙 원통 부분이 바로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공간이다. 하지만 1902년 당시에 전기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1904년이 되어서야 엘리베이터가 운행됐다. 총 공사 비용은 £179,705 파운드가(현재 기준으로 280억 정도)가 들었으며, 이 중 토지 구매와 페리 운영자에 대한 보상금이 £58,000 이상 포함되었다고 한다. 1905년 2월까지 매주 9,000명의 사람들이 터널을 이용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현재는 매년 1,500,000명이 터널을 이용해 템즈 강을 건너고 있다.
이쯤 하면 '터널을 만드는 것보다 다리를 건설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템스 강은 동쪽으로 갈수록 강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다리 건설을 위한 비용이 많이 든다. 당시 런던의 가장 동쪽에 건설된 타워 브리지는 1886에 건설을 시작해 1894년에 완공이 되었다. 타워 브리지가 도개교가 된 이유는 런던 동쪽으로 큰 배가 드나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완공에 8년이라는 시간과 £1,184,000가 들었다. 만약 그리니치에도 다리를 만들고자 했다면 강 폭이 넓은 그리니치는 훨씬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니치 도보 터널 완공에 3년의 시간과 £179,705라는 비용이 들어간 걸 보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리를 지을 다른 이유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하나는 웨스트 런던에 비해 이스트 런던은 인구 밀도가 항상 낮았기 때문에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 가지 여담으로 그리니치 도보 터널은 고스트 스팟으로도 알려져 있다. 빅토리안 시대의 복장을 한 남녀가 출몰한다는 얘기이다. 유령의 존재는 믿거나 말거나 한 내용이지만 터널은 템즈 강 아래에 위치한 탓에 내부는 항상 서늘하고, 결로로 인해 벽과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있다. 낡은 내부는 120년이라는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잘 어울릴만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길이 뜸한 한적한 시간에 방문한다면 자연스레 몸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리니치에 들른다면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https://www.british-history.ac.uk/survey-london/vols43-4/pp518-528
https://islandhistory.wordpress.com/2013/12/14/island-gardens/
https://islandhistory.wordpress.com/2015/04/01/greenwich-foot-tunnel/
https://isleofdogslife.wordpress.com/2013/01/16/room-for-a-view-the-battle-of-island-gardens/
http://forgottenhighway.co.uk/greenwich5.html
https://alondoninheritance.com/under-london/greenwich-foot-tunnel/
https://www.visitgreenwich.org.uk/things-to-do/greenwich-foot-tunnel-p1373551
https://artuk.org/discover/art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