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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Oct 02. 2024

사소함의 소중함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도약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모든 삶은 지극히 사소한 일들을 얼마나 잘해냈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인생은 그런 일들의 최종 결산인 셈이다. 이제 우리를 지켜보는 눈도, 우리를 흥분시킬 일도 없는 그저 그런 날들 속에서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잠자면서, 두서없는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권위와 능력이 주어질지가 결정될 것이다.『소로의 문장들』(헨리 데이비드 소로) 중에서. 중앙일보 2024.2.15(목) 28면


우리 시대, 우리 이전 시대는 남아선호사상이 심했고 남녀 차별이 당연했던 때였다. 그래도 우리 집은 일찍부터 서구화가 되어 남녀차별이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은연 중에  아들은 딸보다 더 대접받고 우선시 되는 것은 감당해야 했다.


남편은 6녀 2남 중의 장남이었다. 아니, 20살까지는 외동아들이었고, 20세 때 막내이자 둘째 아들인 동생을 보았다.  남편은 같은 학과 동기생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동생을 보았다는 소식이 강의실에서 광고되었고 우리는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다. 그때까지 남편은 외동아들이었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아들 하나는 안된다고 딸을 다섯이나 낳고  40대에 둘째 아들을 낳으신 것이었다.


연애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여러 과정을 거쳐  시집을 갔더니 남편의 동생은 일곱 살이었다. 남편과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시동생이 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레이디 퍼스트 위주로 보였던 남편은 가서 보니 완전 귀남이었다.  다섯이나 되는 여동생들은 오빠 때문에 받은 차별을 이러저러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많은 식구와 항상 데리고 있던 군식구들 때문에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하였고 배가 고팠다. 밥을 할 때 어머니는 보리밥을 밑에 깔고 위에 딱 두 그릇만 나오게 쌀을 얹었다고 했다.  밥이 되면  먼저 아버지와 아들에게 먹일 하얀 쌀밥을 퍼서 주고 들에게는 시커먼 보리밥을 퍼주었다고 했다. 밥상에서 하얀 쌀밥을 먹는 오빠를 그렇게 부러워했다고 했다. 철마다 몸이 약하다고 아들에게는 보약을 지어 먹였고 온갖 약재들을 구해 떨어지지 않게 먹였다고 했다. 자신들에게는 보약같은  걸 한 번도 해주지 않아 몰래 오빠의 보약을 훔쳐먹기도 했다고 실토하였다. 대학 다닐 때 아들 중심의 집안 이야기를 하다가 그것을 당연하게 말하는 남학생과 대판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가장 좋은 것, 가장 맛있는 것을 따로 챙겨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에도 아들 먼저의 특별 대접하면서 사소하고 골치 아픈 집안일에 아들은 항상 열외였다. 아들을 열외 시키는 것에 열받아서 지나친 아들 감싸기에 항의라도 할라치면  부모님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달랬다. 아들은 큰 일에 쓸 것이니까 봐주자고. 남자는 큰 일을 것이라고.


그런데 살아보니 큰 일은 인생사에 몇 번 일어나지 않거나 거의 없었다. 몇 번 없는 큰 일에 대비하여 아들은 언제나 열외 대기조였고 소소한  일상에서 면제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기하면서 기다리던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고 정작 큰 일이 생기면 손님 같던 아들은 집안 일을 히 몰라 딸들에게 미루기 일쑤였다.


가끔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  지칠 때, 특별한 조명이나 평가를 받은 적이 없는 삶에 잘못 살아왔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  평범함이 지루하고  찌질해져서  내가 해낸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빈 손이구나 싶은 자괴감이 들 때,


반짝하고 형광등이 켜지듯 반전이 되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


아, 그렇지.

나만 그러는 게 아니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글이나 문장.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겪어본 대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는  대단한 비상이나 도약은 일어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오히려 사소한 일들을 얼마나 잘 감당해 냈는가에 의해 평가된다고 말한다. 인생은 큰 일을 위해 대기하는 대기조가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고 주어지는 작고 사소한 일에 성실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실행라고 말한다.


맞다. 인생에 큰 일은 몇 번 오지 않거나 아예 오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사소한 일들의 연속이요,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일상의 집합이 인생일 수 있다. 매일 주어지는 평범한 일상을  잘 살아 내야 가끔 오는 큰 일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글에서처럼 우리의 모든 삶은 지극히 사소한 일들을 얼마나 잘 해냈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인생은 그런 일들의 최종 결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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