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 중에 예쁜 친구가 있었다. 예쁜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해야 할 정도로 성숙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친구는 입학하면서부터 대학 제일의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키도 크고 센스도 있었지만 지나치지 않는 조용함도 있었다. '00과 김영희'는 대학의 모든 학생들, 남학생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본격적인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봄바람 속에도 대학의 상징이었던 홍매화는 눈부시게 피어났고 사진작가들은 사진기를 메고 홍매화 나무 아래로 몰려들었다. 홍매화가 지고 완연한 봄이 되면 백목련이 하늘을 향해 피기 시작하였다. 청초하고 청순한 백목련은 수줍게 피다가 나중에는 흐드러지다 못해 꽃잎을 벌린 채로 비장하게 낙화하였다. 수줍게 예뻤던 꽃봉오리에 비해 만개 후 떨어지는 백목련은 소복 입은 여인의 치마처럼 처량하였다.
모두의 관심 속에 있던 친구가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대는 연극반의 선배 남학생이었다. 그런 소문 속에 있던 두 사람은 가을 축제 때 올려진 연극에서 남녀 주인공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다. 어설픈 연기였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한 연극은 초미의 관심이었고 그 이후 두 사람은 공개적인 연인이 되었다. 잘 생기고 아름답고 젊은 두 사람의 연애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화제를 몰고 다녔다.
선배였던 남학생이 졸업하자 친구는 학교를 자퇴하고 결혼을 하였다. 학업보다는 사랑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결혼을 하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나중에 친구가 고백하였다. 어느 날 아침에 남자 친구와 모텔에서 나오다가 과 교수님을 그 앞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제자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으시던 교수님께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학교를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가끔 신혼집에 놀러 간 친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친구는 예쁘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갈한 테이블보를 깔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것으로 못다 한 공부를 대신하면서 일찍 홀로 되신 젊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우리가 대학 졸업반이 되어 진로에 취업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 친구는 딸 둘을 낳아 키우며 가정주부로 살아갔다. 특별한 활동도 없이 조용하게 살아갔지만 간간히 찾아가던 대학친구들이 전하는 소식은 가슴 아팠다. 친구는 지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편의 집은 유복했고 유식한 집안이었다. 다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그 집안의 중심이었다. 시어머니도 대학을 나온 인테리 중의 인테리였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들과 요란하게 연애하느라 대학까지 집어치운 며느리가 도무지 못마땅하였다. 연애하느라 대학도 마치지 못한 며느리의 조신하지 못한 행동거지가 하나에서 열까지 거슬렸다. 배운 시어머니답게 은근하고 교양 있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아침이면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시켜 마셨다. 식사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을 주문했고 살림 솜씨를 평가하였다. 남편 없는 어머니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제지할 수 없었고 자기만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자존심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친구는 말없이 시들어 갔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견디던 친구는 화를 이기지 못한 시어머니의 병시중까지 해야 했다. 병에 시달리고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시어머니는 아들 부부의 다정한 모습도 질투하였고 온갖 것에 역정을 내었다. 그런 시어머니를 친구는 구박을 다 받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다.
친구는 대학을 마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딸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부모의 미모를 물려받은 딸들은 잘 자라서 명문 대학의 대학생이 되었다.
모든 고생이 끝나고 자기 식구들만의 생활을 누릴 때가 되자 친구는 병이 들었다. 너무 늦어서 돌이킬 수 없는 병이었다. 몇 년을 투병하다 친구는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이었다. 친구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남편이 그렇게 서럽게 울더라고 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울고 또 울었다고 했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래서 결혼했고 열심히 살았던 것이 누구의 잘못이며 누가 사과하고 사과받을 일인가. 그렇지만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다. 아무 조건 없이 시작한 사랑이 꽃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갔다는 것이...
세상의 그 많은 만남 중에 사랑으로 만났지만 슬픔으로 끝나는 가슴 아픈 만남도 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옆에서 봤던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픔이고 슬픔이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모르는 보석 같은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작은 보석 같은 힘으로 모진 현실을 참아내지 않았을까. 이것 또한 신비한 만남이요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