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양하다. 일평생 평온한 삶이 있을까마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삶도 있다. 춘화 언니의 경우가 그랬다.
경상도 바닷가 깡촌에서 자란 춘화는 아버지를 몰랐다. 어쩌다 만난 남자에게서 아들, 딸을 얻은 엄마는 나 몰라라 팽개친 남자를 대신해 아이들을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아무리 일해도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골을 벗어나 읍내로 나와 살면서야 춘화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여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읍내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엄마를 봉양했다. 얼마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춘화는 시골을 떠나 서울 친구네 자취방에 얹혀 지내며 일자리를 구했다.
그 무렵 친구의 언니가 결혼 자리를 소개했다. 자기 시동생인데 부인은 가출해 버리고 늙은 할머니가 네 손주를 데리고 고생한다는 이야기였다. 춘화는 이상하게 마음에 끌려 남자를 만났다.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남자는 독학으로 학교를 다니고 행정 직원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여 교수가 된 사람이었다.
교수가 된 남자는 주변의 권유로 서울 유명 대학 무용과 출신의 부잣집 여자와 결혼하여 4남매를 낳았다. 가난이라고는 몰랐던 부잣집 무용수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살림과 육아, 시부모 모시기 등 가정 일을 견디지 못하였다. 처녀시절의 화려했던 씀씀이를 줄이지 못하고 남편의 이름으로 빚을 끌어들여 사치를 계속하였다. 결국 지방 일간지에 대서특필된 대형 금융사고를 내고 가출한 뒤 이혼을 하였다는 것이다.
춘화는 남자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네 아이들과 늙은 부모에 허덕이는 남자가 불쌍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아마도 불우했던 자기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동일시되었을 수도 있었다. 춘화는 그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자기를 지켜 줄 친정이 없는 것도 어려운 길을 선택하게 한 요인이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들어간 집은 사춘기 아들이 셋에 천방지축인 딸이 하나 있었다. 천성이 어질고 착한 춘화는 남편의 학교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해냈다. 남자의 얄팍한 월급봉투에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 등 열 식구가 매달린 살림은 아무리 절약해도 곤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춘화는 계절에 상관없이 몸뻬 바지가 너덜너덜해져 살이 보일 때까지 입었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젊은 며느리 속살이 보인다고 한탄하면서 싸구려 바지 하나를 사다 줄 때까지 허리띠를 졸라매고 졸라맸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았다. 이미 사춘기에 접어들어 머리가 굵어진 아들들은 날마다 반항에 싸움에 사고를 쳤다. 춘화는 어린아이들이 겪어야 했을 상처를 생각하며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자 모든 것을 다 참아 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어머니 대신 들어온 춘화 앞에서 비뚤어만 갔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남자만 춘화의 헌신과 희생에 고마워했고 미안해했다.
남자는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었다. 연구와 강의에 열심이었고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앞장서는 지성인이었다. 80년대에 불어닥쳤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해직교수가 되어 감옥까지 갔다. 춘화는 감옥에 간 남편을 대신하여 손수레 하나를 구하여 튀김 장사를 하면서 집안 살림을 이어갔다. 바람 잘 날 없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하였다.
세월이 흘러 시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면서 비로소 한숨을 쉴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몇 년의 옥살이 끝에 다시 대학에 복직하여 정년퇴직한 남편과 좋은 세월을 보내려니 했다. 그런데 몇 년 못 가 남편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춘화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인 것이 한이 되어 식구 많은 집으로 들어와 온갖 고생을 다하였지만 그래도 혼자인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던 춘화였다.
이제 춘화는 혼자 살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운동하고 혼자 구경 다니면서 혼자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그런 결혼을 하라면 하겠느냐고 물으면 자신은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미워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돌아가실 때의 남편의 모습이 너무 깨끗하고 고와서 저런 사람이 자기 남편이었다는 것이 고마웠다고 했다. 그렇게 속 썩이고 거부하던 아이들은 이제는 엄마라고 부르면서 명절이면 찾아오고 용돈도 주고 전화도 한다고 대견해한다.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본다. 있을 수 없는 인생은 없다. 다양한 삶의 모습 속에 피할 수 없는 자기 몫의 삶이 있는 것 같다. 자기 분량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