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현희

by 선희 마리아

친구는 명랑하였다. 키도 크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였다. 아버지가 같은 학교 선생님이라 모두에게 주목받는 학생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운동복 바지에 교복 치마를 걸쳐 입고 복도를 뛰어다니다가 교무실로 붙들려 가서 손들고 서 있기도 하고 친구들하고 운동장에서 놀다 수업 시간을 놓치기도 하였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잘하였다. 특히 수학에는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수학에 골머리를 앓던 내가 어떻게 하면 수학을 잘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문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답이 보인다고 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국어를 잘하냐고. 나도 대답했다. 문제를 읽어보면 답이 떠오른다고. 이과와 문과의 머리가 확실히 다르다고 서로 이야기했다.

​친구는 약대로 진학하였다. 수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네 자매의 맏딸로 짊어져야 할 몫을 생각해야 했다. 첫 시간에 들어오신 수학과 교수님께서 친구의 이름을 호명했다. 수학 시험에 만점자는 처음이라고. 수학 교수님은 수학과에 오지 않은 친구를 못내 아쉬워했다. 그렇게 유명해져서 친구는 또 무리를 이끌고 다니면서 명랑하고 유쾌한 대학 생활을 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는 다니던 여학교 건너편에 있는 병원에 취직하였다. 선교사들이 자선 목적으로 세운 병원이었다. 병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의료봉사를 하면서 합창단을 조직하여 찬양과 노래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친구는 병원 합창단에 들어가 재미있게 의료봉사를 따라다녔다. 한 달에 한 번씩 봉사를 가고, 봉사를 위하여 매주 합창 연습을 하면서 접근해 오는 남자가 있었다. 친구에게 직진한 것이 아니라 친구 주변의 외곽을 맴돌았다. 같은 의사들보다 약제실 사람들을 더 가까이하였다. 명랑했던 친구와 남자는 서로 선 본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러다가 정이 들었다. 친구의 집에서는 아버지 없이 가장 노릇을 하는 남자와 지나치게 결벽하다는 남자의 어머니 소문에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남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독학을 해야 했다. 대학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과외를 하며 학비를 마련하였다. 그렇게 졸업하고 병원에 온 사람이었다. 어렵게 공부했지만 성격이 호탕하고 재미있어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 아버지는 인자하고 정이 많은 성격으로 두 사람을 끝내 방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자가 측은하여 감싸고 거두는 편이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행복하였지만 남자의 어머니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천방지축인 친구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눈을 내리깔고 기다리는 시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다행히 남자는 군의관이 되어 강원도로 떠나게 되어 친구도 따라갔다. 비로소 시작된 신혼이었다. 군대 생활을 마치고 남자는 강원도 쪽에 자리를 잡았다. 10년이 넘는 긴 수련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외과 병원을 개원하였다. 성격 좋고 수술 솜씨가 뛰어났던 남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타향에서의 개원 생활을 활기 있게 해 나갔다. 객지였지만 타고난 명랑함과 친절함으로 신뢰를 쌓아 갔다. 그곳에 터를 잡았으니 제2의 고향으로 삼겠다고 생각했다.

개원하고 7년. 몸이 이상하여 검진을 하다가 엄청난 징후를 발견하였다. 위암 말기. 3개월 남았다는 진단이었다. 외과의사였던 남자는 자기의 몸속에 있는 병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병원을 접고 고향에서 수련하고 만났던 병원으로 돌아왔다. 의사가 아니라 말기 암 환자로 입원하였다. 두 사람을 잘 아는 병원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치료하였다. 남자도 살기 위하여 모든 노력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3개월 뒤인 5월, 어린이날을 앞두고 남자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 막 35살이 된 친구와 6살, 4살 남매를 남기고 갔다. 장례식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친구는 양옆으로 두 아이를 끌어안고 처연하게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장난감을 품에 안고 있었다. 친구는 평소의 당찬 모습대로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더할 수 없이 창백한 얼굴만 친구의 슬픔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남편 없는 긴 세월을 친구는 억척스레 살아냈다. 시댁을 돌보고 친정을 보살피고 두 아이들을 키우느라 소식을 주고받는 것조차 사치였던 날들이었다. 그리고 삼십 년, 친구는 두 아이를 잘 키워냈다. 까다로운 시어머니와 시동생들과도 잘 지내왔다. 친정 부모님도 병수발 다하여 천국으로 보내드렸다.

​만나면 서로 이야기한다. 각자의 인생길이 있다고. 부러워하거나 되돌아 선다고 그 길을 피할 수는 없다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감당하여 걷다 보면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고. 삶이란 내가 계획하여 내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삶에 대해 더욱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뿌리치거나 양도하지 않고 받아들여 감당하는 것도 삶이라고.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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