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이는 수더분하며 조용한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도시에서 대학을 나오고도 집에서 편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일부러 고향에 있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딸이 선생님이 되었다고 사방에 나팔불고 다니는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대학까지 나온 딸이 대견하여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는 딸이었다. 성실하고 넉넉하고 수수한 현남이를 유치원 아이들이나 학부모들, 동료 선생님들도 모두 좋아하여 현남이는 유치원에 출근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한 지 3년이 되어가자 현남이를 결혼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선을 보자는 곳도 많았다. 현남이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기 이야기로 듣지 않고 남의 일 구경하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 살고 있는 가까운 친척 언니가 놀러 오라는 연락을 했다. 언니는 현남이나 부모님이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유치원 물품을 사야 할 일이 있어서 나가야 했던 터라 현남이는 주말에 가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주말이 되어 현남이는 도시로 나갔다. 친척 언니를 만나기로 한 찻집에 들어가자 언니가 웬 남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언니는 같은 동네에 사는 잘 아는 분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라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말하자면 선을 보게 한 것이었다. 현남이는 전혀 준비가 없었던 지라 남자와 마주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몇 마디 이야기도 주고받지 않고 볼 일이 있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미리 귀띔해 주지 않은 언니가 이상하고 야속했다.
시골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자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부모님은 재력이 상당하고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고 했다. 집안도 화목하고 좋아서 현남이에게 꼭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지간하면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계속 권유하였다. 현남이는 한 번 밖에 보지 않은 남자의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가볍지는 않아 보였다고 생각했다. 친척 언니는 어려운 친정을 생각해서라도 그 집안과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 언니의 간곡한 권유로 현남이는 남자를 한 번 더 만났다. 남자는 혼자 나온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친척 언니와 함께였다. 주로 언니가 이야기하고 남자는 듣는 쪽이었다. 남자의 과묵한 모습이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세 번 보고 현남이는 한 달 만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너무 서두르는 것이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왕 할 것이면 미룰 것이 없겠다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결혼식은 끝나 있었다. 결혼 전에 남자를 세 번 만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남자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극도의 신경쇠약과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던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던 남자의 어머니가 잘 아는 현남이의 친척 언니에게서 현남이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을 꼭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을 수십 번이나 하여서 성사된 맞선 자리였고 결혼이었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현남이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몇 번이나 짐을 꾸렸다. 그렇지만 딸을 잘 사는 집에 시집보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친정 부모님을 생각하면 돌아갈 수가 없었다. 불쌍하게 자기의 눈치만 보는 남자와 며느리에게 사정을 하며 자기의 아들을 부탁하는 시부모님들을 보면서 자기만 참아내면 시댁도, 친정도 모두 조용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날 밤을 고민하던 현남이는 이 결혼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남자는 보통 때는 조용하고 얌전하고 부지런하였다. 현남이에게도 자상하고 친절하였다. 그렇지만 한 번 병이 발작하면 현남이를 의심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한 번 시작된 남자의 폭력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지고 심해졌다. 같이 사는 시부모님도 말릴 수 없이 벌어지곤 하는 일이었다. 남자에게 맞아 얼굴이 멍들고 팔다리를 다친 현남이는 멍이 가실 때까지 집에 숨어 있어야 했다. 부끄럽고 기가 막혀 친정이나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시집 잘 가서 시부모님 사랑받으며 사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딱한 사정을 말하여 동정을 사거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은 것이 현남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현남이는 항상 남자의 기분을 살피고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남자의 정신이 이상해지면 밖으로 나갔다. 마땅히 갈 데도 없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어 혼자서 산을 찾거나 하염없이 산책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잠잠해질 때가 되면 자기를 기다리는 시부모님과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또 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둘 사이에 1남 1녀의 자식들이 생겨났다. 현남이는 자식들에게 마음을 붙이고 살아갔다. 딸은 똑똑함이 주변에 자자할 정도로 야무져서 현남이의 자랑이 되었다. 아들도 제 앞가림을 넉넉히 할 정도로 잘 자라 주었다. 아들 며느리와 같이 살며 현남이를 집안의 업으로 감싸고 도는 시부모님을 의지삼고 공부 잘하고 끔찍하게 엄마를 생각하는 자식들을 위안삼아 현남이는 모진 결혼 생활을 잘 참아내었다.
평생을 함께 세파를 헤쳐 나가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아버지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순한 치매였지만 가끔 현남이를 의심하는 행동을 보였다. 아마 아픈 아들을 두고 며느리가 집을 나갈 까봐 평생 노심초사하던 것이 정신을 놓자 무의식 중에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신이 돌아오면 더할 수 없이 자상하고 인자한 시아버지가 되어 며느리를 위하고 위로했다. 치매가 조금 더 깊어지면서 현남이는 시아버지의 똥수발을 해야 했다. 시아버지가 집을 나가 온 시내를 뒤지고 경찰서에 신고하여 찾는 일도 여러 번이었지만 현남이는 남편 대신 자신을 지켜 준 시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현남이는 시아버지의 임종을 자신이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코로나가 끝나 갈 무렵 시아버지가 세상을 뜨셨다. 평생을 부모님과 현남이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남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자 온몸의 기력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자리에 누워 몇 달을 보내다가 남자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먼 길을 떠나 버렸다.
순식간에 시아버지와 남편을 보내고 현남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곁에 사는 딸이 수시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엄마를 위로하고 간병을 하였다. 몇 달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현남이는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동안 살았던 세월들이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 세월이 꿈이 아니었던 것이 딸과 아들, 손녀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남이는 생각한다. 자신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낳고 가정을 지킨 것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자기도 불쌍하였지만 자기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남편이었다고. 평생을 병에 시달리며 제대로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살아간 남편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그래도 자신이 그런 사람의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그리고 그 상급으로 아들, 딸을 낳아서 잘 사는 것을 보는 것이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주변을 정리하자 현남이에게는 방학 같은 날들이 주어졌다. 현남이는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남은 시간을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날마다의 시간이 선물이므로 마음껏 쓰면서 보람 있게 살다가 다시 천국에서 자기를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만들어 준 시부모님과 남편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