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인가

차별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by Sunny Day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저자는 프롤로그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로부터 직접 질문받는 게 이토록 공감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답하기 어려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질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는 사람은 '차별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이 사회'에서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을 실현시키려고 하다 보면 그 믿음보다 현실과 기득권의 강한 저항 앞에 무기력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의 또 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요구하고 요청해야 바뀔 수 있다면 긴 시간과 더 폭넓은 연대로 끈기 있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름도 빛도 없이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책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니, 그 얼마나 아이러니한 문구인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배열하여 아이러니한 현실을 꼬집는구나 싶어서 '뭐지?' 싶었고,

소위 '하얀 거짓말'이라는 관용어처럼 선의를 가졌지만 모두 다 이해하고 누군가는 편들어줄 수 도 없는 어쩔 수 없는(?) 차별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차별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그 누군가(들)에 대한 것인지 헷갈렸지만

책 제목만 보고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결정장애


프롤로그부터 처음 등장한 '결정장애'라는 말은 새로운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의도와 별다른 인식 없이 사용할 말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뜨악하며 책을 읽을 시작 했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 늦는 것,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것, 평범한 것과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 등, 다양한 구분과 분리를 위해 우리는 너무 많은 '혐오표현'을 써왔구나 싶었다.

언젠가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상처 받았다는 사람은 천지인데, 상처 주었다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전자에는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후자인 경우였다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라.

결국 상처 받았다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상처 준 사람은 없는 꼴이다.


혐오표현과 같은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없이도 상처 받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내재되어 있던 차별의식, 기득권 혹은 차별을 하는 입장에서는 느끼기 어렵게 관습처럼 행해오던 것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관념적으로는 평등을 지향하지만 삶은 어떤 그룹과의 적당한 분리와 구분을 정당하고 괜찮다고 생각해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다름 아닌 나일 수도 있겠구나 싶고, 항상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의도가 없음에도 차별주의자가 되었던 순간들은 없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이주민, 성소수자, 아시아인과 흑인, 장애인, 여성, 비정규직, 난민, 지방대(지방 캠퍼스) 출신자...

열거한 이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차별받고 있으며 의도치 않게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전락되고 있다.


나 역시 '결정장애'와 같은 말은 누군가를 차별할 별 다른 의도는 없었으나 나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게 표현한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하곤 했었다.

반대로 차별적 표현을 듣기도 했다. 주로 외모에 대한 것이었다.

까만 피부를 타고나기도 했지만 여자는 하얗고 뽀얀 피부가 더 예쁘다는 심리가 나를 못나 보이게 했는지 여름에 수영장이나 바닷가로 피서를 다녀오고 나서는

어김없이 나만 더 타서 도드라지게 붉어지고 까매지는 까만 피부는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너 되게 까맣다. 초코 우유 좋아하냐? 식구들도 다 피부가 까매요?



외모 때문에 이런 말 듣는 건 기분이 무지 나쁘지만, 그래도 나는 양반이었다.

시커먼스~~ 시커먼스


막내 남동생은 티브이에서 개그맨이 우스꽝스럽게 흑인 분장을 하고 부르던 흉내를 친구들이 그대로 쫓아하며 한바탕 웃어댈 수 있는 우스갯감이 되곤 했었다. 동생이 유치원에 다녔을 때였는데, 동생이 유치원에 가고 난 후 집안에 하얀 가루가 이곳저곳에 흘려져 있던 때가 있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은 계속되었던 하얀 가루 소동은 결국 남동생이 밝은 피부색을 갖고 싶어서 유치원에 가기 전에 엄마 몰래 목욕 후 몸에 바르는 베이비파우더를 얼굴에 바르고 나가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끝이 났었다. 어둡든 밝든, 누렇든 어떻듯든지 간에 피부색의 다름을 가지고 놀림감을 삼아 희화화하는 행위가 당하는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고유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릴 적 장난', '그냥 웃자고 한 소리'를 핑계로 쉽게 우스갯감으로 삼기도 한다. 피부색 외에도 덩치나 키, 이목구비, 목소리 등 외모 차별은 어려서나 커서나 이어진다. 온라인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연예인에 대해서도 마치 가치를 평가하듯 아주 손쉽게 행해진다.


너 참 까맣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가릴 것 없이 들어왔던 나와 동생은 어린 마음에 당시 상처는 받았지만 큰 문제없이 극복(!)해서 잊기도 하고 나중에는 누가 그딴 이야기를 해도 귀담아듣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잘 지나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피부가 까매서 그다지 예쁘고 멋지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얼마 전,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데 장애사역을 담당하시는 부서의 목사님의 설교 중에 자꾸 목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었다.


장애인 친구들의 더딘 변화 때문에
힘들어하던 어느 날,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영적으로 발전이 더딘
영적 발달장애인인가.
하나님을 향한 손과 발이 느린
영적 지체 장애인인지,
영적인 것을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하는
시각, 청각 장애인인지,
영적인 의지가 아주 형편이 없는 의지박약에
감정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장애가 있는 나를
오랫동안 참아주시고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랑부 친구들을 교육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몰랐을 때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알고 나니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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