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기억해야 살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주장하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이다.
상처받았다는 사람들도 천지다.
누가 상처받았고 누가 상처를 주었는지, 결국 누구를 다독이고 보듬어주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서로에게 지쳐있다고 해야할까.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깊어지면 그 사이에서 힘을 받고 누군가와 연결되었다는 데에서 지지망이 넓어졌다는 안정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그 깊은 관계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가까워지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상대에 대한 무언의 기대감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대감은 물질적이거나 눈에 보이게 측정가능한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관계에서보다 더 이해받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고 지내온 시간만큼 나를 더 잘 알아주리라고 하는 기대,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하고 무조건 내 편이기를 바라는 기대같은 게 생기기 마련이다.
사람이 좋다. 참 좋은데, 싫을 때도 있다.
'oo에게 데였다'고들 표현하는 것처럼 더러는 몸서리쳐질만큼 사람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관계가 힘겨울 때가 있다.
데다1 [데ː다][동사]
1.불이나 뜨거운 기운으로 말미암아 살이 상하다. 또는 그렇게 하다.
2.몹시 놀라거나 심한 괴로움을 겪어 진저리가 나다.
유의어 : 몸서리나다, 물리다1, 몸서리치다 [참고:네이버/국립국어원]
몹시 놀라고 진저리가 나는 고통을 왜 데였다고 할까 싶었는데, 문득 3년 전 사고로 다친 왼쪽 무릎 아래의 상처로 눈이 간다.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왼쪽 무릎 바로 아랫 부분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10센치 가량 봉합하는 수술을 하고 한달 넘게 깁스를 하게 되었다. 다친 직후에는 물론이고 회복되는 동안에도 무지막지한 통증으로 진통소염제와 마약성 진통완화 패치 등등 다양한 치료를 했는데, 육안으로 상처가 아문 이후에도 통증은 계속되었고 의사의 최종 진단은 '작열통'이었다.
처음 진단명을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싶어서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드랬다.
이름이 자결통인 줄 알고 무슨 이름이 그렇게 어마무시한가 싶었는데 사실은 작열통이었다.
작열-통灼熱痛 [발음 : 장녈통]명사
<의학> 사지(四肢)에 외상(外傷)을 입었을 때에, 그 말단부(末端部)가 불에 타는듯이 따갑고 아픈 통증. [참고: 네이버사전]
그랬다. 의사 선생님은 발음을 잘 못 하고 계셨다.
[자결통]이 아니라 [장녈통]이었다.
한자를 보아서 알듯, 불타오르듯 타오르는 통증이 작열통이었다.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의 다른 이름.
*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 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
<정의>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은 외상 후 특정 부위에 발생하는 매우 드물지만 만성적으로 지속되는 신경병성 통증을 말한다. 통증은 손상의 정도에서 기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발생하며 해당 손상이 해결되거나 사라졌음에도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주로 팔과 다리에 잘 발생하지만 드물게는 다른 신체 부위에도 발생할 수 있다. 해당 부위가 주로 화끈거리거나 아리는 듯한 양상의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이러한 통증은 미세한 자극에 의해서도 유발되는 경향이 있고 흔히 해당 부위 조직의 부종이나 피부 색깔의 변성을 동반하게 된다. 해당 부위는 다른 부위와 체온이 다르다거나 비정상적으로 땀이 나서 감각이 예민해지는 등의 자율신경계 이상 증상이 주로 동반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별안간 불에 타는 듯한 통증, 상처 부위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다. 사실 나는 심각한 수준의 다른 CRPS환자들만큼의 고통은 아니라 별 탈 없이 일상을 살고 있지만, 궂은 날씨가 찾아오려고 하늘이 거뭇거뭇해지면 어김없이 무릎부위가 욱신거리곤 해서 그 날의 상처를 다시 기억나게 한다.
'아무개한테 데였어' 하는 표현을 평소에 쓰지는 않았지만,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풀어내는 하소연 중에 심심치않게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상처와 통증을 비추어 그 표현을 다시 생각해보니 상당한 고통으로 느껴졌다. 남편에게 생선구이로 밥상을 차려주려다 손등에 기름이 튀어 금새 수포가 오르고 아파서 어쩔줄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다던 친한 언니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흔이 넘은 성인에게도 작은 화상은 그 순간이 고통스럽고 참기 힘든 것이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 뱉은 쓰디쓴 말을 생각하면 또 다시 불에 데여 화끈거리듯이 아프고 마음이 저려오는 것이다. 덩치 큰 어른도 손톱만한 작은 상처에 눈물이 찔끔 날 때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참기 어려운 순간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만다.
통증이 시작되면 그순간은 잠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다. 시간을 멈추고 통증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버틴다. 출근길에 통증이 일면 쉬었다 다시 가고 따가운 시선을 무릎쓰고 노약자석에 앉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제천, 의성, 부산으로 출장을 가던 중에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증으로 고속버스를 놓칠 때도 있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마찬가지려나 싶다. 문득 그 때의 속상함이 되살아날 때면 가슴에 불이 난 듯 그 때의 화기를 다시 머금고 속으로 속으로 타들어가는 걸. 그럴 때면, 아무 것도 소용없다. 응어리 진 불씨라 부지깽이로 뒤적거리지 않아도 금새 불붙어버린다. 흘러가는 유행가를 듣다가, 길을 가다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을 지나칠때도, 서랍 속 먼지쌓인 일기장을 펼치다가도 금새 불타오르곤 한다. 쓰리고 아프고 다시 화끈거려도 그 벼락같은 통증을 어쩌지 못해서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맞아들인다. 그저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레 불씨가 잦아들때까지 잠잠히 그렇게 고통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요동이 잠잠해지면 다른 부지깽이로 들쑤시기전까지는 참을만 하니까, 그렇게 또 살게 된다.
마냥 웃기만 하는 사랑은 없는가보다.
사랑하려면 각오해라! 상처받을 뿐더러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아라! 하는 경고메시지 같다.
사랑이 이렇게 아픈 거였냐며 호들갑스럽게 아파할 때, 사랑은 생채기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고통은 삶의 연금술이라고 한다.
삶에서 만나는 고통, 상처, 위기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니고 목적이 아니라 우리 삶을 좀 더 제련하기 위한 단계이고 과정인 것이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못하는 삶의 길에서 무엇을 피해야 할지 언제 상처받을 지를 가늠할 없으니 그저 마딱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상처와도 우리는 담담히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한들, 잠시 다리를 오무려 쥐었다가 무릎에 쓰라린 상처가 좀 참을만 해지면 또 일어나 걷지 않을 것인가?
좁은 길을 막고 서 있는 제법 큰 바윗 덩어리를 만난다면, 처음엔 우왕좌왕 하다가 길가로 옮겨볼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끙끙 거리며 밀어보다가 옮길만한 힘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산처럼 타고 넘어가는 방법을 택할 수 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상처받더라도 다시 살아가게 된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불꽃처럼 되살아나는 상처를 고통스럽게 부여잡고 가슴을 치더라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 삶이 그렇다. 해가 뜨고 지고를 반복하고, 날이 날을 붙들어 쌓이면 그 다음 계절을 부르게 되는 것처럼. 내가 살고 싶지 않고, 걷고 싶지 않아도 살게 되고 걷게 된다. 죽을 것 같았던 쓰라림도 잦아드는 시간이 찾아오고야 말고, 휘청거릴지언정 눈 앞에 놓인 길위에 다리를 뻗게 되는 것이 삶인 것이다.
삶은 생명 그 자체이다.
살아있는 것은 자라게 되고, 변화한다.
상처 역시 자랄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점차 흐려지고 흔적만 찾을 수 있는 정도로 늙어있기도 하고, 가슴팍에 더 깊게 새겨지며 진한 엑기스로 남기도 한다.
상처를 가진 채 어른이 되었다고
서글퍼 할 필요없다.
상처없다 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 흔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상처를 보듬느라 주저앉아 쉴 수도 있었고, 상처를 디딤돌 삼아 막힌 길을 넘어오기도 했다.
흔적이 사라지진 않았어도 오래된 상처와 수백번의 되새김은 단단하고 주름진 흉터를 남기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해주는 노크가 되기도 하고, 기댈 어깨가 되기도 한다.
상처로 피가 나고 딱지가 생기고 채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로 덧입기를 반복하며 굳은 살이 두껍게 배기고 나면 왠만한 자극에도 끄떡하지 않을만큼 단단해지고 만다.
상처는 그렇게 쓸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