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가을

여름을 밀어내는 힘

by Sunny Day

116년만의 폭염이라고 떠들석하며

'덥다, 더워'를 습관처럼 내뱉던 여름이 끝났다.


지난 주말, 열대야에 우리 가족의 여름밤도 하루에 멀다하고 하얗게 지새우다

결국은 백기를 들고 에어커을 구입하기로

결정했었다.

에어컨사용이 신념을 저버리는 것은

아닌지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생존문제가 되어버린 더위에 마음을 굳히고

화요일에는 이사오기 전에 살던

동네 작은 전자제품 대리점을 찾았다.


이제 정말 몇 대 남지 않았다고,

특히 고효율 냉방제품에 대한

10퍼센트 환금혜택이 있는

1등급 제품은 목요일이 지나면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기까지

1, 2주간 대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장님의 말씀은 구입해야 겠다는 마음을 더 굳히게 했다.

기왕 살 걸 지긋지긋한 저 더위를 더 버티며 보낼

필요가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좀 더 싸게 살 수 있는지

인터넷 가격 비교사이트를 기웃거렸지만

에어컨 설치까지 앞으로도

족히 1주일은 기다려야 한다는 판매자의 당당함에 쉽고 빠른 동네 대리점을 선택했다.

수요일 아침 전화해서 구입하겠다고 했고,

잠시 후 그날 오후에 바로 설치해주시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때까지 꼼짝않고 대기하고 있다가

부부기사님 두 분이 2시간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며

거실 한쪽에 에어컨을 설치해주셨다.

2도를 낮췄는데도 시원한 기운이

집안에 도는 것이 살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엄마랑 여동생과 함께 셋이서

거실 바닥에 이부자리를 펴고

감기걸릴라 조심해라 하는

다소 우스워보이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시원하게 잠이 들었고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렇게 그 다음날도 에어컨 덕에

시원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부터

부쩍 서늘해진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밤 새 비가 와서 그런가 싶긴 했지만

한낮이 되어도 전날과 다르게

에어컨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갑자기 가을이 왔다.

높고 파란 하늘과 바람결에

시시각각 움직이는 구름도 예술이었다.

계속 하늘만 보게 되었다.

아무리 올려다 보아도 질리지 않고,

어느 편 하늘이 됐든 누가 찍든 작품이었다.


그동안 못봤던 것인지,

며칠 새 변했는지 푸르던 잎사귀는 노랗게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계획도 없었지만, 하늘을 내다보고

가만히 집에만 있을 수 없어

배낭 하나 매고 생수 한병 들고서는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에서 하늘과 구름에 감탄하고

오랜만에 맑게 개인 날씨에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 풍경까지

몇 시간을 감상하다 집으로 오니

현관문을 열자마자

반짝반짝 빛나는 새 에어컨이 보였다.

저녁시간이 되어 식구들이 모여 둘러앉았는데, 티비를 보다가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푸하하하, 너무 웃기지 않아?
에어컨을 안사려고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큰 맘 먹고 샀는데,
들여놓은지 이틀만에 가을이 됐잖아.



제 할일도 못한 채 굴비가 되어버린
우리 집 에어컨아,
앞으로 반년 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더라도
너무 슬퍼하고 노여워하지 말기를...


이 좋은 가을을 즐기고 있는데,

또 갑자기 겨울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때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지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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