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ig satisfied May 31. 2022

22’05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을 보다

전시를 향한 나의 양가적 감정


작년 여름부터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 못지않은 인기를 끄는 전시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다. 작년(2021년) 4월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2만 1,693점과 국립현대미술관에 1,488여 점의 미술품들을 납세와 사회환원의 목적으로 기증하면서 시작된 전시다. 이런 대량의 미술품 기증도 처음이지만, 기증품의 콘텐츠가 다양하고 수준급이라 굉장히 많은 주목을 받았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 등의 지정문화재 60건과 고서, 고지도 등의 고미술품은 국립박물관에,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의 한국 근대 대표 작가들의 작품들 1,600여 점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되었다. 국내 작가뿐만 아니라 피카소, 모네, 로스코 등의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다수였기에 외신 또한 이 기증에 관심을 가졌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두 번 정도 예약 시도를 해봤으나 불가능함을 깨닫고 일찌감치 관람을 포기했다. 원래는 올 3월에 전시 종료 예정이었으나 인기에 힘입어 두 차례나 연장되어 6월 6일까지 전시가 연장되었다. 게다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전시 예약제가 4월 현장 발권 입장으로 바뀌면서 멀지도 않은데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지난 5월 5일. 아침 일찍 가면 사람이 없을 줄 알고 휴일에 늦잠을 포기하고 오픈 시간 즈음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한국에는 명품관 오픈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전시 오픈런이란 진풍경을 마주하였다. 미술관 입구 밖으로 끝없이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어들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미술관 안으로도 줄이 한참 늘어져 있어 망설임 없이 전시를 포기하고 왔다. 집으로 오는 길, 단군이래 한국 미술계에 이런 문전성시는 없었다는 기사를 보았다.ㅎㅎ 현장발권제로 바뀐 이후 매일매일 오픈런이 벌어지고 하루 평균 입장객이 3,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이 전시를 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올라와 오픈런을 할 정도니 정말 이 전시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평일 예정된 오전 일정들이 펑크가 나서 즉흥적으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오픈(10시) 전인 9시 40분쯤 도착했는데, 줄이 꽤 있었다. 100명 관람 제한이니 미술관 입구부터 나까지 100명이 넘을까 안 넘을까 눈대중으로 세는 사이 내 뒤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10시가 되자 미술관이 열렸다. 전시회 관람은 무료이고, 티켓은 1인 1 티켓으로 제한되어 있다. 티켓팅 후에도 줄을 지어 전시실로 이동하는데, 전시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곳에서부터 3시간 소요 예정이란 안내 팻말을 보고선 지난번 관람을 포기하고 집에 가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관람객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전시실 앞에서 대기하다 10시 15분쯤 전시실에 들어갔다.

평일 점심 경 입구 대기 줄(왼)

이번 전시는 이건희 컬렉션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한국 근현대 작품을 중심으로 50 점이 전시되어 있다. 연장 전시에는 이중섭의 <황소> 같이 원래 전시에 들어가 있었던 몇몇 작품들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예정된 전시반출되어 빠져있었다. 전시는 크게 수용과 변화, 개성의 발현, 정착과 모색이라는 3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용과 변화] 일제강점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미술계에 생긴 변화를 보여준다. 유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전통 서화들에서 변화가 감지되지 시작된다. 대표작가로 백남순,  이상범, 이도영이 있다. [개성의 발현] 해방과 한국전쟁의 시기에 해당한다.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전쟁의 아픔이 혼재하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도 작가들은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새로운 미술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시기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으로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의 작품이 있다. [정착과 모색]에서는 한국전쟁 속에서 유학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리 잡게  새로운 미술을 보여준다. 이응노, 천경자 등의 독특한 그림체를 가진 작가들을 중심으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내 전시장 가는 길(왼), 이건희 컬렉션 전시 입구(오)

좋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사람도 정말 많았다. 그림을 보는 건지 사람을 보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전시 관람은 1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사실상 전시장에 입장하면 통제가 어려워 더 보고 싶으면 더 볼 수 있다. 찬찬히 여유 있게 감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웬만한 시장통 저리 가라 할 만큼 사람이 많아 여유 있는 감상은 사치로 느껴졌다. 전시를 다 보고 나니 그냥 집에서 모니터로 감상하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알았더라고 왔을 거다. 궁금한 건 직접 해봐야 하는 인간이니까. 사진 찍는 게 쉽지 않았지만, 맘에 드는 작품들 위주로 몇 장 남겨왔다.


아래 백남순 작가의 <낙원>은 작가가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동양의 무릉도원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 어딘가 굉장히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다. 작품 설명에서는 동양의 무릉도원과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이 결합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아르카디아는 쉽게 말해 한국의 무릉도원을 생각하면 된다. 서양의 이상향으로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 되는 물아일체의 삶을 의미한다. 낙원에는 동서양의 이상향이 투영되어 있는데, 결혼하는 친구에서 그만큼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로 작가가 이 그림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전통적인 병풍 형식에 담아냈는데, 국내 1세대 서양화 작가의 고민이 깃들여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백남순 작가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오면서 작품들을 챙기지 못해 많은 작품들의 행방을 알 수 없는데, 이 작품은 그녀의 해방 이전의 작품 중 유일하게 남은 작품이다.

백남순 <낙원> (1936년경)

이도영 <기명절지도>. 기명절지도는 청동기, 도자기, 꽃, 과일을 소재로 한 정물화이다. 조선 말기부터 인기를 끈 장르인데, 그림 속 각각의 정물들은 부귀, 장수 등을 상징한다. 당시 고상하고 부유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다양한 계층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수많은 기명절지도 중에서 이도영의 기명절지도가 주목받는 것은 전통과 새로움의 결합 때문이다. 구성과 형식에서는 전통을 따랐지만, 빛과 어둠을 표사하고, 청동기 대신 우리나라 토기를 넣어 그림에 사실성과 민족성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전통과 새로움의 결합보다도 그림 자체가 주는 정갈하고 단아한 분위기에 끌렸다.

장욱진 <나룻배>는 전시 홍보를 보고 가장 기대했던 작품인데 생각보다 크기가 정말 작아 놀랐다. 나룻배 속의 소, 소년, 닭을 안은 여인, 항아리를 인 여인, 뱃사공이 탄 배의 풍경은 평화롭고 정겨운 마을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 그림 속 풍경은 작가의 고향이다. 장이 설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나룻배에 물건을 가득 실어 강을 건넜는데 이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평화로운 그림은 한국전쟁의 시기였다. 전쟁의 피폐함 속에서 작가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마주하던 모습에 대한 향수를 담아낸 듯하다.

이도영 <기명절지도> (1920년대)(왼), 장욱진 <나룻배>(1951)<오)

아래 작품은 (내 기준)이 전시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이다.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라 불리는 김환기는 일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국내에서 큐비즘, 구성주의적 기하추상, 초현실주의 등을 실험하였다. 해방 이후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그때부터  백자, 달, 사슴, 학 등의 토속적인 소재들로 추상작품 활동을 하면서 전통을 현대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아래 작품은 1950년대 국내 방직 재벌인 삼호그룹 회장이 자택의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한 작품이다. 나무, 항아리와 여인들, 백자, 학, 사슴 등은 신사실파 시기부터 50년대까지 김환기가 즐겨 사용하던 모티브들이다. 이 그림은 자택 벽화용으로 개인이 주문한 만큼 에는 전쟁과 피난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들 대신 궁궐이나, 고운 한복과 같은 장식적인 측면들을 부각하는 소재들을 사용하고 있다. 삼호그룹이 소장하던 이 작품은 방만한 경영으로 미술시장 경매에 나왔는데, 그때 삼성가가 구매했다고 한다. 널찍한 캔버스에 펼쳐진 파스텔 톤의 민속적 주제들에서 구성과 색채의 아름다움과 함께 어딘가 전통미가 느껴져서 좋았다. 복작거리는 전시장 틈에서 가장 오랫동안 감상하다 온 작품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작품들을 즐기는 것 같아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 이런 방대한 양의 대작들을 한 개인이 지금껏 독식해왔다는 점에 기분이 묘하게 안 좋았다. 미술 소장품 기증이 결정된 이후 국내 언론은 연일 삼성가를 칭찬하느라 바빴다. 이 전시가 이건희가 국민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는 둥, 재산의 60%를 사회 환원했다는 식의 언론보도가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고, 국민정서 또한 상당히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삼성가의 미술품 기증을 아름다운 동화로만 보기에는 기증 발표 시점이나 실제 기증 규모를 고려하면 불편한 구석이 많다. 고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은 12조 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5년간 분할 납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병원 설립, 희귀 질환 어린이 환자 지원, 미술품 기증을 하기로 발표하였다. 법에 따라 내야 하는 상속세를 제외하면 사실상 기부액은 3~4조 원으로 재산의 11~15%이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고, 기부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모든 국민은 재산을 물려받으면 상속세를 내야 할 의무가 있고 탈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모든 국민이 이  의무를 다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기부를 넘어 모두가 지키는 의무까지도 삼성의 선행인 것처럼 바라보는 것 같아 불편했다. 게다 기증 발표 시점 또한 이건희 회장 별세 후 6개월이 지나, 상속세 신고와 납부기한을 이틀 남겨둔 시점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증했다고 칭찬하기에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건희’ 컬렉션이란 전시명 또한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컬렉터의 이름을 걸고 전시를 구성할 때는, 컬렉터, 컬렉션이 만들어지는 과정, 기증자 등에 대한 평가와 컬렉션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채 등장한 ‘이건희 컬렉션’이란 전시명은 마치 이건희가 정말 국민들에게 선물을 준 것 과 같은 인상을 준다. 상속세의 일부로서 국가 소유로 넘어온 이 작품들을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시 잘 보고 와서는 왜 딴지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작품이 아름다웠다고 해서 작품이 전시장에 걸리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었던 문제들까지 미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시작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을 보고 싶으면서도, 연일 전시장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기사들을 보면서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드는 양가적인 감정은 이런 불편한 과정에서 오는 게 아닐까.


포스터 사진 출처: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1



작가의 이전글 22’04 보령 상화원에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