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집착 사이
벚꽃놀이를 제대로 다녀본 기억이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늘 시험기간이 걸쳐 있었고, 선생님들은 대학가면 꽃구경 실컷 한다며 시험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재수 때는 재수학원이라는 감옥에 있었기에 벗꽃을 볼 엄두가 안 났다. 대학교에 가면 정말 꽃구경 실컷 하는 줄 알았는데, 대학교에도 중간고사는 있었다. 물론 내가 꽃구경을 안 갔다고 해서 책상에 앉아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으며 공부를 한 건 아니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공부는 안 할지언정 꽃구경을 가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대학교 졸업하면 마음껏 볼 줄 알았는데, 난 대학원을 갔고 대학원은 늘 쪽글과 소논문과의 싸움이었기에 벚꽃 구경은 정말 사치처럼 느껴졌다. (물론 대학원에서도 벚꽃 볼 시간까지 아껴가며 공부만 한 건 아니다. 벚꽃구경을 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작년 겨울 대학원을 수료했다. 드디어 (수료생은 더 바빠야 하는 게 맞는 것도 같지만) 매일매일 압박이었던 수업과 시험과 쪽글에서 벗어나 벚꽃구경을 갈 수 있게 됐다.
벚꽃시즌이 오기도 한참 전 2월부터 벚꽃구경을 계획했다. 동네 벚꽃구경을 넘어 벚꽃여행까지 계획했다. 올해 2월 갔었던 속초의 돌담마을이 너무 예뻐서 벚꽃시즌에 꼭 다시 와야지라고 마음먹고 있었던 차였다. 작년 강원도 벚꽃 개화 시즌을 몇 번을 검색 끝에 날짜에 맞춰 숙소를 예약했다. 한 달 전부터 숙소를 예약해 놓고는 꽃이 안 필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여행 일주일 전, 서울은 여전히 추웠다. 벚꽃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도 나는 여전히 경량 패딩을 입고 남산을 올랐다.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에는 꽃몽우리가 맺히긴 했지만, 꽃이 피기에는 한참이 더 걸릴 것만 같아 애가 탔다. 게다가 일기예보는 여행 가는 날 비까지 온다 하여 이러다 꽃은 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그렇게 나는 강원도 도착도 전에 아쉬움만 가득 안고 지난 수요일(4월 7일) 속초로 떠났다. 요 며칠 날이 따뜻해 여기저기 꽃이 피기 시작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풍성한 벚꽃 무리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며칠만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시간만 생기면 제대로 벚꽃놀이 가는 줄 알고 기대를 했는데, 만개한 벚꽃을 마주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속초 어딜 가든 벚꽃은 이제 막 꽃봉오리에서 피기 시작하여 희끗희끗 분홍색을 띄고 있었다. 속초는 목련이 한창이었다. 아쉬운 대로 목련 사진을 많이 찍었다.
2박 3일 속초여행 내내 날씨가 참 따뜻했다. 이제 여름이 오는구나 싶은 날씨였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을 보고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덕인지 집으로 가는 날 만개한 벚꽃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주에나 만개할 줄 알았는데, 이틀 새 만개한 벚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해가 열심히 꽃을 피웠나 보다. 아마 다음 주에 왔으면 꽃이 다 져서 보지도 못했을 꺼다. 속초의 벚꽃 명소는 설악산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국립공원 가는 2차선 도로 위 양쪽의 벚꽃나무들이 만개해 있었다. 이 날 강풍이 많이 심해 나뭇가지들이 맥없이 휘날렸는데 그 모습이 꼭 우리한테 인사를 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원래 이 길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곳인데 모든 차들이 이심전심인지 천천히 달렸다. 거북이 행렬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벚꽃 구경은 실컷 했다. 벚꽃을 차창 필터 없이 보고 싶어 잠시 주차를 하고 내렸으나 이날 강풍이 너무 심해 내린 지 5분도 안되 벚꽃 감상을 포기했다. 차 안에 감상한 걸로 만족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나의 벚꽃에 대한 (집착과 같은?) 열정은 집에 와서도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비 소식을 앞두고 벚꽃 떨어질까 여독을 채 풀지 못하고 남산길에 올랐다. 사람이 많았다. 남산의 벚꽃 명소는 남산도서관에서 팔각정으로 올라가는(버스가 내려오는) 길이다. 올라가는 내내 벚꽃을 맘껏 구경할 수 있다. 평소 운동할 때 십 분이면 올라가는 그 길을 사진 찍는다고 30분이 걸려 올라갔다. 벚꽃이 정말 예쁘게 만개해 있었다. 바람이 좀만 불어도 꽃눈이 내려 운치가 더해졌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 담고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사진에 남기기 바빴다. 2시간에 걸친 남산 산책 중 나는 100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남겼다. 집에 도착하고 나니 눈으로 더 많이 담아둘껄하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 구경하는 내내 마음속으로 계속 투정을 부렸다. 사람이 좀 없는 아침 일찍 올걸, 사진에 담고 보니 좀 수형이 아쉽다, 왜 풍성하게 안 담길까, 현충원 벚꽃도 보러 가야 하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벚꽃을 앞에 두고 왜 즐기지 못하고 이런 생각들을 했을까.
한 달 동안 벚꽃 풍경을 보려고 날씨 앱을 매일매일 들락날락거리고 애태우며 시간을 보내 놓고 막상 벚꽃 앞에서 카메라 속 벚꽃만 보고 있는 내가 순간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을까. 나는 벚꽃이 보고 싶었던 걸까 벚꽃구경을 간 나를 기념하고 싶었던 걸까. 매년 피는 이 꽃에 나는 왜 이렇게 집착하며 올봄을 보냈을까. 오늘 남산 자락에 끝없이 펼쳐진 벚꽃을 담은 끝없는 나의 사진 폴더를 정리하며 글을 마친다. 내년 봄엔 좀 더 현명한 꽃구경을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