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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g satisfied Apr 21. 2024

24‘04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을 움직이는 성>

프랑스 남부 알자스-로렌 여행을 앞두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을 움직이는 성(2004)을 다시 봤다. 콜마르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 재미로 풍경을 예습할까 하고 본 건데, 여행 후 알자스-로렌이 아닌 미야자키 하야오 앓이만 남았다.


어릴 때, 명절에 외갓집에 가면 삼촌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곤 했다. 나의 첫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였다. 이후,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배달부 키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귀여운 만화영화라며 재밌게 봤던 기억은 있는데, 성인이 된 지금 반추해 보면 알맹이는 없고 귀엽고 아름다운 영상들만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하울을 움직이는 성도 그중 하나다. 그 당시 나는 대체 무얼 보고 좋다고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를 이해했다.. 어릴 적에는 꽃미남 마법사 하울과 저주에 걸려 할머니가 된 소피의 해피엔딩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사랑과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사랑은 하울과 소피가 보여주는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소피가 황야의 마녀, 무대가지, 강아지, 캘시퍼와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는 성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저주에 걸린 두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실현하면서 저주가 풀리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성장의 과정을 보여준다.


하울은 유능한 마법사지만, 어릴 적 불의 정령과 계약을 맺고, 자신의 ‘선을’ 위해 싸운다. 하울에게 선이란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닌 모든 종류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추구하는 데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폭력(전쟁)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하울 본인이 폭력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외면하기 위해 하울은 외적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하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며  살아간다. 그것이 외적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돈이나 명예, 성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나 스스로를 바라볼 때 가장 나답고 인간다워질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건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다. 아름답지 않으면 살 의미가 없다던 하울이 소피를 만나면서 삶의 의미를 찾듯이 말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하울의 내면을 나타낸다. 움직이는 성처럼 하울은 어딘가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타인과의 교류에 있어 굉장히 폐쇄적이다. 그런 철옹성을 뚫은 게 소피다. 소피는 굉장히 쉽게 성으로 들어간다. 소피가 집에 머물면서 성이 깨끗해지고, 분위기가 바뀌고, 점점 더 많은 외부인(황야의 마녀, 강아지, 무대가리)이 성에 머무르게 된다. 이는 하울에게 타인에 대한 여유가 생긴 것을 나타낸다. 소피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마음을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하울은 자신의 행복을 찾기 시작한다.

하울에게 진정한 삶과 사랑을 준 소피 또한 자신에 충만한 삶을 살아오던 캐릭터는 아니다. 소피는 타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베풀 줄 알지만,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는 소피가 저주에 걸리고 난 후 외모 변화에서도 알 수 있다. 저주에 걸린 소피의 외모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떨 때는 할머니로, 어떨 때는 다시 소녀의 모습으로, 또 어떨 때는 중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외모 변화는 소피의 내면의 변화에 따른 변화이다. 소피가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할 때는 원래 자기 자신의 젊은 모습인 반면, 현실 안주적이거나 소극적일 때는 할머니의 모습을 띤다. 대표적으로 설리먼과 당당히 대화할 때 소피는 원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띤다.


아름다운 풍경과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우울감이 느껴졌다. 그게 바로 성장과 사랑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둘 다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고, 때로는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소피와 하울처럼 모두 저주에 걸린 채 살고 있지만, 타인에게 나의 저주를 말하지 못하고 꽁꽁 숨기고  살아간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그런 나를 나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 꽃길만 있진 않을 것이다.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나를 인정하는 것만큼, 날 것 그대로의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소피가 하울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순간 또한 하울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괴물이 되어 돌아온 순간이다. 내가 알던 타인의 진실이 추악할지라도 그 또한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한다는 건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천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미묘하게 울적하고 (감당하기) 벅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을 마치며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영화의 말미에 소피가 황야의 마녀에게서 하울의 심장을 건네받을 때의 모습이다. 하울의 심장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면 빨리 뻇을까를 고심하고 악을 쓰기보다. 마녀를 꼭 안아주는 그 모습. 그리고 소피의 마음을 알기에 순수히 심장을 내어주던 마녀의 모습. 사랑이 고파 하울의 심장에 집착하던 마녀 역시 소피의 사랑을 통해 하울의 심장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잊지 말자 소피의 순수하고 애정 어린 그 마음. 영화의 배경이 된 콜마르 사진 몇 장으로 글을 마친다.















콜마르의 쁘띠베니스
지붕에 황새가 사는 생마르탱 성당
콜마르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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