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신용(6)
지난번 아경이 <핸드폰 명의>를 요구하는 지인에게 ‘화’를 참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 참은 것이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아경은 그때 참았던 화를 다 터뜨릴 것이 분명했다.
아경에게 '화'는 체력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주는 일이 되었다. 화를 내면 며칠 앓았다.
그럼에도 드물게 미친년처럼 ‘광분’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아경은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광분하는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이 뒤집히고 목구멍에서 피가 날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장 마지막으로 ‘광분’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 가까이 왕래가 없었던 막내 삼촌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의 땅을 자신이 독차지하기 위해 아경의 상속포기가 있어야 한다며, 아주 권위적인 목소리로 <네 인감도장을 당장 나에게 보내>라는 삼촌의 말을 수화기를 통해 들었을 때, 정말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곁에 누가 있는지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리고 아경은 막 퍼부어댔다.
뭔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10년 가까이 남남처럼 왕래도 연락도 없다가 뜬금없이 인감도장을 보내라는 것이 무슨 경우냐"라고 따진 것 같았다.
"내 나이도 낼모레 오십을 바라보는데, 무슨 어린애한테 하듯이 이래라저래라 그딴 식으로 명령을 하냐"
"내가 삼촌을 뭘 믿고 인감도장을 보내겠냐"
"먼저 삼촌 인감도장을 내게 보내주면 왜 인감도장을 함부로 주면 안 되는지 참 교육을 시켜주겠다"라고도 한 것 같았다.
삼촌은 6남매 막내로 큰형의 딸인 조카 아경보다 9살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삼촌에 대해 아경이 아는 것은 이기적이고, 치졸하며 인색하다는 것이다.
삼촌이 아경 아버지의 도움으로 취업한 후에 맞이한 설날에 조카들이 세배를 한다고 하면 돈이 아까워서 손사래를 치며 줄행랑을 놨다.
조카들에게 1원도 아까워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삼촌이 결혼할 때는 본인 돈은 어찌했는지 모르지만(아마 잘 숨겨두었을 듯싶다) 삼 남매를 키우는 큰형에게 자기 친구들 술값까지 더 많이 뜯어내지 못해서 성질을 부렸다.
그러니 삼촌 자신이 몽땅 갖겠다고 조카들에게 상속포기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삼촌의 최악은 과거 아경이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했을 때 보여준 모습이었다.
혼자 그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머뭇거리다가 실실 웃으며, 몸을 사리던 비굴했던 그 모습을 아경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처럼 삼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경에게 연장자로서, 집안 어른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9살 많다고, 삼촌이라고 거들먹거리면서 권위적인 태도로 당당하게 아경의 인감을 요구하는 것이 아경의 분노를 불러온 것이었다.
잘못된 요구라는 것을 알고도 먼저 기선제압을 하려고 얄팍한 수를 쓰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집안의 강력한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자라는 내내 <하찮은 종년>처럼 무시당했던 아경의 뿌리 깊은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삼촌의 요구는 그녀에게 <아경이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20여 년 넘게 경력을 쌓고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아도 너 같은 것은 내가 인감도장을 보내라고 하면 잔말 말고 보내야 하는 하찮은 것이야>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아경의 계속되는 지랄발광에 삼촌은 연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자신이 수세에 몰리니, 그런 식으로 아경을 비아냥거렸다.
비아냥거리는 것도 삼촌의 버릇이었다. 예순이 다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 말투도 아경을 열받게 하는 요인이었다.
한참 동안 분노를 쏟아낸 아경은 최종적으로 "관련 서류를 만들어 등기로 보내면 읽어보고 도장을 찍어 줄지 말지 결정하겠다"라고 통보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수년 동안 서로 소식도 없이 지내다가 상속 포기하라고 연락해서 삼촌으로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혹시 아경이가 도장을 찍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는 삼촌의 속내가 빤히 보였다.
아경은 늘 자신에게 무심했던 할아버지의 한 뼘의 땅도 원치 않았으므로 서류에 도장을 찍어 보냈다.
남들 다 아는 것에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