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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그린 Jul 15. 2022

그런 좋은 인간관계는 너나 많이 하세요

돈과 신용(5)


C는 아경이가 취미생활을 하다가 알게 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경에게 자기 가족이 쓸 수 있게 아경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순간 아경은 C가 <제정신인가>라는 생각부터 했다. 


아경의 가족도 요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아경은 이런 상황을 얼마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아경은 오랜 직장생활로 인한 번아웃으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서 어쩔 수 없이 퇴사했다. 


처음 퇴사 의사를 밝혔을 때 회사에서는 아경을 붙잡았다. 


그래서 1년을 더 버텼는데 아경은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 싶어 퇴사를 강행했었다.  


일단 살아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퇴사 이후 C는 아경에게 퇴직금이 얼마나 되는지 몇 번을 물었다. 


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C가 그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C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C가 아경의 퇴직금이 얼마 정도인지 자기 마음대로 예측해서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 이것저것 구상해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주 즐거웠다고 덧붙였다. 


그때 아경은 <아, 이 사람 선을 넘는구나> 싶었다. 


<왜 네가 내 퇴직금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냐>고 C에게 따끔하게 주의를 줘야 했지만, 아경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조차 피곤했다. 


그랬더니 이제 C는 자신과 자신 가족의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아경 명의의 핸드폰을 쓰겠다고 요구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아경과 C의 관계는 가끔 만나서 칼 같은 더치페이로 밥 먹고 주로 C가 보고 싶다는 영화를 보고 수다 떠는 것이 전부였으므로 아경은 어이가 없었다.


칼 같은 더치페이도 <사람들과 만나면 이상하게도 자신이 더 비싼 것을 사는 것 같다>라고 C가 주장해서였다. 


아경은 자신의 돈만큼 타인의 돈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칼 같은 더치페이가 괜찮았다. 


그러므로 아경은 C에게 한푼도 더 부담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아경에게 공연이나 전시 등 초대 기회가 오면 친한 친구들은 백수인 자신과는 달리 여전히 직장생활로 바쁜지라 그나마 시간 여유가 많은 C와 동행했었다. C도 고마워했다.   


여기서 아경이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이유는 <C에게 핸드폰 명의를 빌려줄 만큼 신세진 일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C와는 <칼 같은 더치페이로 만나는 관계> 였다.


아경은 친구들과도 더치페이를 하지만, 그렇게 야박하지는 않았다. 서로가 상대방보다 더 비싼 밥을 사도 괜찮았다. 좋은 일이 있으면 거하게 한턱 쏘기도 했다. 


그러니 아경과 C의 관계는 친구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는 사이 '지인'이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는 아경과 자신의 관계가 가족보다 친구보다 더 가깝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C는 핸드폰 명의를 빌려주는 것이 자신과의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 아경이가 반드시 해줘야 한다는 투로 말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그래야만 좋은 인간관계라 할 수 있는 거예요!”


마치 아경이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어서 자신이 가르쳐 준다 듯이 말이다.  


C와 C의 가족은 아경 명의의 핸드폰으로 <경제적 이득>을 도모하고 아경은 허울뿐인 <좋은 인간관계>에 만족하라는 것이었다. 


아경은 진심으로 C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좋은 인간관계는 너나 많이 하세요>  


하지만 어쩌나 보려고 “핸드폰 소액결제는 어떻게 확인해?”라고 물었다. 


아경 명의의 핸드폰으로 C의 가족이 과도한 소액결제를 하면 어쩌냐는 뜻이었다. 핸드폰이 아경의 손에 없으니 확인이 불가하니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소액결제? 그게 뭔데요. 그런 것은 본인이 알아서 막아요.”라며 짜증까지 냈다. 명의를 빌려달라면 잔말말고 빌려줄 것이지 왜 귀찮게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핸드폰으로 영화예매, 주식거래를 하고 며칠 전에는 동생에게 선물까지 보냈다는 C가 소액결제가 뭔지 모른단다. 


아경은 <거짓말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하든가, 사람을 완전 바보 취급을 하는군>이라고 생각했다. 


슬슬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요”


C가 기분 나쁘다는 투로 말했다. 책임이라, C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아경이 그것을 어찌 아냐고? 


C가 본인 입으로 아경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기 때문이었다. 


만날 때마다 현재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별로 좋지 않으며, 이를 타개할 만한 능력도 부족하다고 하소연을 했었다.


아경은 이제 자신도 백수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나날이 커지는 와중에도 C에게 잘 될 거라고 위로하고 응원했었다. 그 결과가 이렇게 아경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하소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려고 깔아놓은 밑밥처럼 보였다.  


아경은 여전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쌍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C는 “날 못 믿는 거예요.”라며 아경에게 눈을 흘겼다. <더 버티면 나 화낼 거예요> 라듯이. 


누군가 믿음을 강요하는 순간이 오면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아경의 신념이었다.


사기꾼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 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경은 자기 자신도 잘 믿지 못했다. 


신에 대한 믿음도 자주 흔들리는 아경이 왜 C를 믿어야 하겠는가?


그때 아경이가 열망한 것은 딱 하나다. 


<아, 쭉빵을 날리고 싶다. C의 강냉이를 털어 주고 싶다>였다. 


생각만으로도 아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왜 얼굴이 벌게져요?”라며 이번에는 C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경이 다시 생각해보니 C를 한 대 쳐봤자, 손만 아플 테고(통증으로 물리치료를 받기도 했다) 주변에 CCTV가 많으니 폭행죄로 고소당할 수 있을 테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경찰서에서 가족들 얼굴을 보는 것은 민망하다 못해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잘 살아온 인생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화가 치밀었지만 꾹꾹 눌렀다.   


아경은 과거 신용카드 건에서 배운 대로 분명하게 거절했다. 


"빌려 줄 수 없어! 안돼!"


아경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탓에 C도 압박을 멈추었다.


하지만 귀가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C가 말했다. 


“지킬 것이 많다 이거죠. 그래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C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평상 시와 달리 아주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C에게 아경은 <나중은 없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억지로 가라앉힌 화가 그때쯤에 두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속까지 메슥거렸다.   


아경은 그날 이후 C와의 관계를 단칼에 끊어냈다. 


칼 같은 더치페이로 밥 먹고 영화 보고 수다 떠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별로 아쉽지 않았다. 


핸드폰 명의를 빌려주는 것은 핸드폰으로 금융거래까지 가능한 요즘 세상에서 너무도 위험한 일이다.


C가 그것을 몰랐을까? 아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C는 어디서나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소중하게 챙겼고, 많은 일을 핸드폰으로 처리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척, 뭘 모르는 척(소액결제를 모른다고 한 것처럼) 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산전수전 겪어온 사람이었다.  


아경은 이번에도 C에게서 어떤 예감을 느꼈다. 


자신의 퇴직금에 대한 C의 플랜을 들었을 때보다 더 강한 예감이었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핸드폰 명의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자면 상대방이 핸드폰 요금을 내지 않고, 명의자의 허락없이 과도한 소액결제와 금융사고를 일으켜도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기 어렵다. 


명의를 빌려준 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모든 피해는 명의자가 몽땅 뒤집어쓰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다 떠넘기고 잠수를 타면 된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완전 개꿀이다. 


상대방이 불법적인 일에 사용했다면 명의자는 처벌도 같이 받아야 한다. 자신이 공범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명의자는 억울해서 화병으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냥 그 사람과의 관계를 빨리 끊어내는 것이 피해를 미리미리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경은 그렇게 했다. 


다만, 살짝 아쉬웠던 것은 그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말고 C에게 한마디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누굴 바보로 아냐, 이 XX아"라고 일갈했어야 했다.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적당하게 화를 내는 것도 건강에 좋은 것인데,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그리고 바보 취급당한 기분 나쁜 기억을 깨끗이 털어버리기에도 필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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