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에트르타-옹플뢰르-몽생미셸 (3)

역사 속으로 걸어가다

by 써니스타쉔


미카엘 천사의 언덕, 몽생미셸


먼 곳에서 자재를 나르며 돌산에다 건축물을 만든다는 것은 지금도 쉽니 않은 일인데 8세기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80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매년 35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하니 공들인 세월이 아깝지 않아 보인다.


몽 생 미셸 수도원(Abbaye du Mont Saint-Michel)

미셸은 미카엘이라고도 읽으며, 해석해보면 성스러운 미카엘의 언덕 또는 산이라는 이름이다. 미카엘 천사의 지시로 짓게 된 수도원이 역사의 흐름 속에 요새가 되기도 하고 백년전쟁 때에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노르망디에 있는 몽생미셸 Mont Saint-Michel (잉글랜드 콘월지방에도 이름이 똑같은 장소가 있는데, 두 곳이 놀랍도록 비슷하다)은 당시에도 지금처럼 높은 바위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견고한 성채였다. 그리고 밀물 때가 되면 육지와 연결되는 주변길이 바닷물에 잠겼다. 바로 이곳에 ‘뛰어난 학자’ 헨리가 병사들과 함께 틀어박혀 있었고, 로버트와 윌리엄은 그 주변을 빈틈없이 포위했다. -중략-
몽생미셸을 버리고 방랑길에 오른 헨리는 가난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 11세기 잉글랜드 역사 중 ‘형들의 배신에 위기를 맞은 헨리 왕자의 이야기, 제 9장 왕자들의 난,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선택> 중에서


몽생미셸 드로잉 맵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에 이르는 건축양식은 교회의 영향으로 가장 높은 곳은 신과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사제 그리고 일반 상인과 농부들이 차례로 머무르는데 몽생미셸도 여기에 부합해 축조되었다.


입구에서 한창 인증샷을 날리고 있는데 일행이 보이지 않아 서둘러 입구를 통해 수도원에서 가장 낮은 곳 시민들이 거주했던 공간을 먼저 만났다.


입구에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레스토랑인데 사진만 보더라도 오랜 세월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1인분에 22~25유로 사이니 제법 비싼 편이어서 외관만 감상하고 수도원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표지판.
암벽산 위에 세워진 곳이라 그런지 연결된 통로는 한 사람 정도 지날 수 있었다.
고딕 양식의 수도원은 수직 첨탑은 아치로 연결되며 노트르담 성당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중세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장 높은 첨탑은 신으로 향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첨탑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성 미카엘 대천사를 볼 수 있다. 너무 멀어서, 카메라로 줌을 해도 자세히 보기는 어렵기는 했지만 멀리서나마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첨탑 앞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속세와 떨어져 지냈을 수도원의 사제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지 않았을까. 새벽부터 출발한 여정 속에 어느덧 하루를 마감하고 있는 석양을 몽생미셸에서 보내니 파리로의 여행이 더 값지게 느껴졌다.

이번 여행길에서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신부님 한분이 무리 중에 섞여 있었다. 최근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그린 영화 <저 산 너머>에서 가슴을 울렸던 명대사가 떠오른다. “삼시 세 끼 밥은 꼬박 챙기면서 와 마음의 양식은 안 챙기노?”라며 육신 못지않게 정신의 양식도 꼬박 챙겨야 한다고 하는 말이 무종교론자인 나에게까지 와 닿았다.

중정의 뜰 주위로 회랑이 구성되어 있는데, 몽생미셸에서 유일하게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수도승들이 이곳을 통해 하늘의 신과 소통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수도승들이 유일하게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래전 지어진 곳이어서인지 어둠 속 촛불에 의지하며 속세와 단절한 그들을 위로해 준 것은 아름다운 자연과 어둡고 긴 밤을 버티게 해 준 와인이 아니었을까. 내륙에서 600m는 가까운 거리지만 자연으로부터 종종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던 그들의 식수는 주로 빗물이었고, 오랜 세월 영양공급 부족을 겪은 수도승들은 30-40년의 짧은 생을 살았다고 한다.

불빛 하나 들어올 수 없는 이 곳에서 기도하며 지냈을 수도승들은 아마도 성모 마리아상을 바라보며 이겨내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수도원의 마지막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