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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스타쉔 Jul 31. 2019

중국, 러시아, 그리고 북한 3국이 만나는 곳 훈춘

이념의 다리를 지나며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생가터까지

연길에서 훈춘으로, 기차로 40분
일찍 잠이 들었지만 새벽 3시에 눈이 절로 떠졌다. 백야인가 싶을 정도로 밤이어야 하는데 대낮같이 밝았다. 알고 보니 극동 지역이라 오전 3시면 해가 중천에 떠오른다고 했다.


R은 친구와 모처럼 여행을 하고 싶다며 다른 호텔에 숙소를 잡아 오전 우리 숙소로 픽업을 왔다. 기차역까지 택시로 20분 남짓. R은 훈춘이 고향이라 연길은 잘 모른다고 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연변이 훨씬 크다며 놀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간 타 도시에 대해 잘 모르면서 연변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만 한국에서 봤던 터라 작은 단편적 사실만 가지고 연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둔 것 같아 역시 경험하기 전에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연길시에서 훈춘시까지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 중국, 북한이 만나는 극동 접경지역, 훈춘
훈춘시에 도착하니 R의 친구 G가 차를 끌고 우리를 마중했다. 3국이 만나는 접경지역으로 출발했는데 차로 약 1시간 남짓 비포장도로로 이동했다. 끊임없이 보이는 자연경관에 무엇하나 나오지 않을 법한 느낌이었지만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에 도착했다.

간이 버스로 중국과 북한을 잇는 다리에 도착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걸어만 가면 바로 보이는 곳에 북한이 있었고 두만 강변이나 국경 지점까지 걸어가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역사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익히 들었던 그 두만강이라니. 나와 두만강과는 관계가 1도 없지만 가슴속 깊이 숨을 깊게 매쉬며 그 강을 거쳐 갔을 수 없이 많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떠올려 보며 잠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졌다.



다리를 나와 Fangchuan으로 이동했다. 접경지역을 볼 수 있는 관람 코스인데, 티켓을 사고 버스를 탔더니 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여권 검사를 한다. 친구는 중국인이라 괜찮지만 우리는 한국인이라 룡호각만 갈 수 있다고 했다. 티켓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룡호각 전망대만 구경했다.

룡호각에서는 러시아, 중국, 북한의 3국이 한눈에 볼 수 있는 타원인데 강을 두고 구분하고 있었다. R의 말에 따르면 과거 러시아 지역을 관할하던 곳을 바라보면 소위 훈남 오빠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을 잇는 철도가 놓여 있는데 아마도 남북한 통일을 이루면 러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한 번에 지나갈 수 있을 것을 생각하니 교과서나 선생님의 어떤 말보다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서로 가지 못한다니 역사적 서글픔이 느껴졌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새삼 실감하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과거에 업적을 세워 동상까지 만들어진 장군 옆에서 장군 흉내도 내보며 말길을 옮겼다.

공산품이 비싼 러시아 지역에서는 극동러시아와 중국의 접견 지역인 훈춘시에서 저렴한 공산품을 대량 사간다고 한다. 어째 중국에 갔는데 한국의 기념품과 러시아 기념품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러시아의 대표 인형 마트료스카 Mateyoshka와 러시아 초콜릿 등을 파는 상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선 너무 비싸 살 엄두도 못 냈던 인형인데 선물 겸 여러 개를 쓸어 담았다.



북한 식당과 함흥냉면
북한과 가까운 중국 지역이어서 북한 식당에서 라이브 공연까지 하는 곳이 있다고 해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북쪽 지역이어서인지 냉면은 함흥냉면이 인기라고 했고 거의 대야 수준에 냉면이 나왔는데 1인분 치고는 양이 상당히 많았다.


서빙과 공연하는 어여쁜 아가씨들이 눈에 띄었는데 북한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얼핏 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조선어-한국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감이 달라 이렇게 표현하는 게 이해를 도울 수 있어 보인다-와 중국어로 번갈아 가며 가창 실력과 미모를 뽐냈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구나.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벌써 아이돌 스타가 될 법한 자질을 타고났는데 중국 큰손-회장 또는 사장급 손님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들에게 웃으며 술을 따라주는 모습이나 노래와 서빙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니 사회적 이념으로 만들어진 속박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별빛 찬란한 민족학교, 독립운동가 윤동주 중학교

첫째 날의 감동과 놀람을 뒤로하고 우리는 연변에서 롱징으로 행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바로 독립운동가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와 그의 생가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롱징에 자리한 민족학교 앞에서 현재 공사 중이며 운동장까지는 중국인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아쉽게도 교문 앞에서만 인증샷을 찍을 수 있었다. 계속 교장 선생님이 지켜본다는 말에 북한과 가까운 이 곳에서는 아무래도 한국인의 출입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윤동주 생가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약 30분 정도 달려 윤동주 생가에 도착했다.


일명 신골짜기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깊은 산 속이었는데 때마침 비가 그쳐 그가 남긴 시가 새겨진 돌조각과 생가와 정자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기사가 약 20분 정도의 시간을 주었는데 외진 곳이라 시내에서 무조건 왕복으로 택시를 이용해야 돌아올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철없던 사춘기 시절 무턱대고 외웠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등의 주옥같은 시가 돌과 기둥 등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겪지 않았던 일제 치하에서 방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타지의 감옥에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남겼던 그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시의 단어와 구절 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비록 그때의 고통을 나누지는 못 하지만 새삼 이렇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유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작지만 단단한 애국심이 생겨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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