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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햇님 Oct 08. 2019

많으면 많은 대로 피곤한 남편의 손재주

무수한 아이디어와 야무진 손은 갈피를 잃고

오랜만에 구두를 신고 오래 걸었다. 오르막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굽 있는 구두로 내리막을 걷는 것은 고문이 따로 없다. 발이 앞으로 쏠리면 좁디좁은 구두 앞코로 다섯 개의 발가락이 서로 비집고 들어가겠다고 야단이다.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발가락은 만신창이, 무릎은 제대로 펴지지도 않아서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다.

오늘 드디어 면접을 보고 왔다. 이력서를 여기저기 많이 보내고도 통 연락이 없어서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게 경력 단절, 아기 엄마의 현실인가?’ ‘말로만 듣던 한국 취업난이 이런 거였나?’ 다행히 면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2차 면접이 확정된 것도 아니라서 안심하기도 이르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보니 요리하는 남편 다리에 아기가 엉겨 붙어 아빠 다리를 사정없이 할퀴고 있다(요즘 졸리면 저러는데, 오늘의 타깃은 아빠).


남편은 오늘, 평소(남편만 근로자이던 시절) 내가 보내던 하루 일과를 똑같이 겪었을 것이다. 아이와 놀아주고, 때 되면 밥을 먹이고, 집에서만 놀면 지루해할 테니 밖에도 데리고 나가 적당히 걷게도 하고, 또 밥때가 돌아오면 챙겨 먹이고. 아기가 낮잠을 잘 때 틈틈이 집도 치워 놓고, 찬거리도 만들었겠지.  

오늘처럼 반나절 이상을 밖에서 보내는 경우는 이제껏 거의 없었지만, 이런 순간에도 남편에게 애와 살림을 맡기는 게 불안하지는 않다. 왜냐, 남편은 손끝이 아주 야무지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도 깔끔하고 청소, 빨래 잘하는 남자라는 게 꽤 매력적이었는데, 같이 살다 보니 점점 더 놀라고 또 안심한다.


“아주 참해. 같이 살길 잘했어!” (궁둥이 토닥토닥)




남편의 살림과 요리 실력에 대해 말해보자면, 아기를 낳고 집에서 몸 회복하는 동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일본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산후조리원 같은 시설 개념이 특별히 없는 일본에서는 출산과 동시에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데, 남편은 입원 기간 내내, 그 이후로도 거의 6개월 정도 내 식사를 준비해줬다. 남편이 당시 학생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나와 아이의 영양을 위해 열심히 먹는 일에 집중했고, 남편은 평일 9시에서 18시까지 일해 돈을 벌면서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집안일과 요리에 매달렸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집안일 비중을 늘려갔지만, 남편 역시 아기가 돌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줬다.

무엇보다 감동했던 지점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과일을 준비해줄 때 내가 하던 것과 꼭 같은 모양으로 깎아준다거나, 평소 내가 자주 만들던 반찬을 기억해뒀다가 그대로 요리해준다거나, 미역국 질릴까 봐 다양한 버전(이를테면 소고기 미역국, 조갯살 미역국, 황태 미역국, 들깨 미역국, 소고기 뭇국 등등)의 국 요리를 연구한다거나. 적고 보니 사소하지는 않네.


남편이 많들어준 그 많은 음식들 중 이거 하나 사진으로 남겼다. 내가 너무했네. 맛있었던 짜장면.


가장 기특했던 건 아기가 백일쯤 되었을 무렵, 친정아빠가 날 보러 일본에 다녀갔을 때였다. 일정 중 하루는 우리 집에서 김치찌개를 끓여 드렸는데, 생선구이를 내가 살 바르는 방식으로 똑같이 떼어내 아빠에게 대접하는 모습을 보고 좀 감동했다. 그건 사실 어릴 적 아빠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아빠는 무뚝뚝하고 표현도 별로 없는 분이었지만, 가족이 다 모여 식사를 할 때는 간혹 다정하게 음식 먹는 법을 알려주셨다. 게장 딱지에 밥을 비벼 먹는 방법이랄지, 구운 생선을 젓가락 몇 번 움직이는 걸로 눈 깜짝할 새에 뼈와 살로 분리해 밥 위에 척 올려준다던지.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알려주며 은근히 뿌듯해하셨다. 아마도 그날, 남편이 생선을 발라줄 때 아빠는 추억에 젖었을 것이다.




남편의 손재주는 비단 살림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빛이 난다. 몇 번씩 얘기했지만 인테리어 분야에도 두각을 보이는데, 나무와 파릇파릇한 식물을 좋아하다 보니 우리 집은 ‘그린 인테리어’에 가깝다. 똑같이 물도 주고 사랑도 주는데, 내가 키우는 식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잃고 시들어버리는 반면, 남편이 맡은 화분들은 자라고 번식해 몇 번씩 화분갈이를 한다. 섬유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답게 바느질이나 다림질 솜씨 또한 단정하다. 취미로 필름 사진을 오래 찍었고, 대학 시절, 수업으로 사진 인화 방식까지 배웠다더니, 남편이 찍은 사진에서는 묘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남편이 찍은 사진과 셀프 인테리어. 남편의 손재주를 보세요들. 제가 팍팍 밀어줘야 할까요, 말려야 할까요?


하지만 이런 재주가 탈이 될 때도 있다. 우선 본인 스스로도 손으로 하는 걸 대부분 자신 있어하다 보니 가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의 손을 거치면 모든 일이 다 될 거라 여기는 객기 혹은 순진무구함. 그래서 그의 ‘해볼까?’ 리스트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바리스타로 시작해서 제빵, 목수, 천연염색, 원예, 농업. 이 어딘가를 계속 헤매며 아직까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일본에서 회사원으로 지낼 동안, 남편은 자신이 회사를 그만 두면 비자가 곧 소멸되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외국인 노동자)의 입장을 난처해했다. 그러면서 회사를 다니지 않고도 떳떳이 비자를 받을 방법을 오랫동안 연구했다. 그중 학생의 길은 본인과 맞지 않는다며 애초에 포기했고, 기술공으로 남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식구가 딸린 입장에서 무작정 알지도 못하는 환경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생각만으로 그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기막힌 아이디어를 하나 짜냈다. 일본에서 자본을 거의 투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했다.


“한국 김, 정말 맛있지 않냐? 일본인들도 분명 좋아할 텐데.”

“아무래도 고소하니까.”

“우리 김 구울까? 김 굽는 기계만 하나 사면 될 것 같은데. 한식은 사업 비자 잘 나온대.”

“여기 김도 비싸고 참기름도 비싸잖아.”




거의 몇 개월간 남편은 마트에서 한국 김을 살 때마다 포장지에 적힌 재료를 유심히 살폈다. 사촌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올 때 한국 김을 종류별로 부탁해 받아보기도 했다. 참기름과 식용유가 몇 % 비율을 차지하는지 분석해 표로 만들고, 브랜드 로고와 이름까지 고민했다. 김은 한국에서 주문하고, 기름만 지역 업체를 뚫어야겠다고 했다. 보통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저렇게 깊게, 구체적으로 성실히 빠져드는 편이다. 급기야 군산이 고향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구체화되면 장인어른께 김을 얼마에 공수받을 수 있을지 물어봐 봐.”

“그래, 그러자! 상가 겸 집으로 할 수 있는 장소도 얻으면 좋겠다.”

“그렇지. 1층에서 바로 구워서 기름 발라 팔면 냄새가 고소해서 잘 팔릴 거야.”

“우리 둘 다 박 씨이니까 ‘朴朴(パクパク;일본어로는 ‘파쿠파쿠’라고 읽으며, 퍽퍽 먹는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때 사용하는 의성어)’라고 하면 되겠다.”

“오~ 그거 완전 좋은데?”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렇게 남편의 말에 호응하며 같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건 내게 놀이와 비슷하다. 여자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을 때 적정선의 허언을 늘어놓으며 까르륵 웃고 떠드는 종류의 수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나도 참 이상한 게, 계속 이 남자의 말을 받아주고 있다 보면 어느새 혼자서 심각해지고 마는 것이다.


‘진짜로 사업을 하려는 건가? 그럼 우리 또 이사하는 건가? 상가 얘긴 괜히 꺼냈어. ㅠ’


한동안 잠잠하던 남편은 어느 날 벽에 붙여뒀던 로고 디자인 그림을 때어냈다. 궁금하던 내가 먼저 물었다. “김 사업은 잘 진행하고 있는가?” 남편은 자영업 얘기라면 이제 시시해진 사람처럼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다 귀찮아~.” 나는 남편이 당장에라도 뭔가를 저지를 것만 같아서 조마조마하다가도, 한편으론 하고 싶은 걸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건 아닌가 걱정한다. 손재주와 아이디어가 아까워서 뭔가를 속 시원히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 반, 우리 삶의 평화와 안정이 깨질까 봐 그를 저지하고 싶은 마음 반.


한국에 오면서 둘 중 하나가 먼저 취업되면 남은 사람이 반 프리랜서처럼 지내며 아이를 돌보자고 했었다. 오늘 스타트로 내가 면접을 봤다. 정말로 만약에 내가 먼저 근로자가 된다면, 우리 집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굴러가게 될 것이다. 남편은 이번에야말로 그토록 원했던 손기술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겨우 1차 면접 하나 봐놓고 상상의 나래를 길고 넓게도 펴고 있는 나였다. 남편과 나는 닮은 듯 다른 듯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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