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피플 속 내 모습 찾기
많이 들어서 알고 있고, 심지어 많이 보기도 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보라색 책이었다. 그리고 다 읽은 책은 뒤적거리는 법이 없는 나로 하여금 한 번을 내리 다시 읽게 한, 누군가가 소설을 추천해달라면 제일 먼저 생각이 나는 손에 꼽는 책이 되었다.
병원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이 소설에는 피프티 피플이 등장한다. 병원 배경의 작품이 한두 개이겠냐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에나 각 인물마다의 이야기나 아주 영리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과 고치는 사람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은 만물상 같은 장소에 오가는 사람들이라니, 백만 가지의 이야기가 가능한 조합이다. 의사, 간호사, 환자, 보호자 등 익숙한 사람들과 MRI기사, 이송 기사, 해부학 기사, 임상시험 책임자, 제약회사 영업사원 등 익숙한 듯 새로운 직업들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과적 화물차량 사고 피해자, 살해당한 여학생 등 외면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까지 읽을 맛이 난다. 게다가 인물관계 파악을 위해 앞 뒤를 수시로 넘나드는 다급한 손 넘김에 피식 웃음까지 나는 걸 보니 이 책에 난 푹 빠진 것이 틀림없다.
호감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중략) 알바트로스와 치자 열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도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p.248,양혜련)
역시나 또 애정하는 인물이 생겼다. 좋아한다기보다는 비슷해서 너무나 이해가 되는 인물이다. 어느 면이든 하나라도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근무를 하는 건 좋다. 좋음을 넘어서서 잘하고 싶게끔, 이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지 않게끔 해야겠다 마음먹게 하는 환경은 쉽지 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데 그렇게 잘하고 싶었는데 나의 결과물이 그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 때, 잘하고 싶은 나의 의지가 오바로 비치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스스로가 요란한 빈수레가 된 것만 같다.
사람의 진심을 알아봐 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다. 해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양혜련도, 그녀의 호감을 호감으로 받아주고 신뢰해 준 진선미(역시 등장인물이다)까지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사랑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얼마나 삶이 풍요로워지는지 알지 못했다. 한번 산책을 하면 열몇 가지 아름다운 장면을 발견했다. 걸음이 빠른 편이던 호 선생은 아내에게 느리게 즐기면서 걷는 법을 배웠고, 가까운 곳과 먼 곳에 시선을 던지는 법도 배웠다. (p.115,이호)
이유 없이 흐뭇해졌던 순간. 기꺼이 옆사람의 속도에 맞춰,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궁극적인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닮음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옆자리의 퍼즐처럼 가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
이 책은 작가의 말까지, 아주 작정하고 끝까지 좋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시시하도록 사소하고, 남이지만 나이게도 하는 우리의 옆을 돌아보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50명의 사람들이 되어 보면서 그들의 생각에, 그 관계에 놀라기도 하면서 어느새 내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거창함 없이도 생각게 하니 정말 좋은 책이다. 이 작가가 아무렴 제일 사랑했을, 어쩌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을 ‘돌을 멀리 던지는 일’보다 더 좋았던 그 다음 말로 마무리한다. 후회 없이.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p.381,소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