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는 못 읽어냈지만 기억될만한 숨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극찬했던 테드 창이라 처음부터 궁금했던 책이다. 놀라운 SF소설이라고 해서 엄청 기대를 했는데, 역시 소문난 잔치상은 화려했다. 이해가 안 되면서도 이해가 되는 것이 차려진 것부터가 신비로운 밥상이었다. 일단, 모든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 것으로 귀속시키니 마음이 세상 편해짐. 환상적인 아라비안 나이트로 동굴 문을 활짝 열어젖힌 이 책이지만 정작 숨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숨인데 숨을 포기한 독자가 비단 나뿐만이 아니길 바라며 넘긴 뒷부분. 그리고는 금세 매직에 걸려들었다. 망막 프로젝터를 눈에 장착하게 되고, 리멤이라는 기록 검색엔진으로 기억을 찾아내는 시대의 이야기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문장을 줄 치다, 문단을 줄 치다, 급기야 전체 페이지를 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4페이지 정도를 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게 바로 테드 창의 매직이구나.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p301)
모든 사람은 편집자다. 그 순간의 진실보다도 단지 그 순간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나의 선택에 의해서 편집점이 정해지니 모든 사람은 본인의 기억만큼에서는 매우 이기적이고 편협한 편집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기에 서로를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알라딘에서조차도 알리 왕자와 알라딘 사이에서 자스민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니까!!
기록과 기억 사이에서 우리는 좀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순간을 불러 낼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망각이 주는 자유와 미화된 기억이 주는 아련함 속에서 우리는 좀 더 인간다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S. 인생에 손꼽는 몇 안 되는 SF를 읽다 보니 나도 창의력x창작욕이 꾸룽꾸룽거려 적어봤다. 그냥 지금 이 기분의 기록쯤으로.
갈수록 비교적 최근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디지털 치매란다. 뭔가를 생각하고 불러오는 시간이 현격히 느려졌다.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진단을 받고 나니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동안 기억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 기억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기억을 안 하다 못해 이제는 기억을 부를 기본적인 말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버리다니. 기억할 거리가 적은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서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애꿎은 남탓이라도 하고 싶다.
보고 듣는 것 말고 쓰고 읽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디지털 치매라서가 아니라 리멤을 깔고는 그런 행동 자체를 안 해 본 것 같다. 그래서 무작정 서점에 가보고 싶었다. ‘라이프로그 극복하는 50가지 방법’, ‘느닷없는 디지털 치매도 괜찮아’ 이런 무빙북이 보이니 그래도 묘하게 위로가 좀 된다. 어렸을 땐 책 구경이라도 했는데, 요즘엔 바로 음성으로 읊거나 영상으로 보여주니 글자를 봐도 내 나라 말이 맞는지 도통 어색하기만 하다. 책장 넘기는 소리 좋았지, 마음에 드는 구절 찾으려면 안 보여서 몇 번이나 뒤적거릴 때가 있았지 하는 아쉬운 푸념만 늘어놓는 것 같아 의미 없이 무빙북 몇 장면 넘기다 그냥 나왔다. 서점에서 조차 읽고 쓰지를 못하니 나는 기억을 어떻게 저장해야 되는 것일까.
내가 리멤을 시작한 건 아마 초등학교를 막 다니기 시작할 때다. 내가 태어났을 때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 집 강아지 해피. 해피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는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해피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그다음 날 내 몸에 카메라를 달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내 기억은 아주 명확해졌다. 물론 라이프로그를 유지하기 전이라 해피 얼굴을 보려면 부모님의 기록을 열람해야 하지만. 정확하지 않게 기억되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느 겨울날 오후, 해피를 반쯤 배고 부엌에 누워있던 순간의 어렴풋한 따뜻함과 그때, 노을 녘 볕을 받으며 요리하던 엄마의 노랗고 붉었던 실루엣이다.
기록을 불러 내는 건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능한 일이니, 매사 시시비비를 가르는 일은 이제 불필요해졌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바뀔 수 없는 사실이 공유되니 남는 것은 ‘감정’뿐이다. 이제 네 말투가 어떻고, 태도가 어떻고, 네 본성이 어떻고, 네 인격이 어떻고 등등 어쩌면 시비보다도 복잡하고 난해하고 예민한 문제를 건들고 그 기억마저 고스란히 보관되어버리니 관계의 강을 건너버리기 일 수다. 가까스로 잊히다가도 욱하고 생각나 라이프로그를 돌려보면 또다시 강을 건너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진심을 모르겠다. 진심을 모르겠으니 특별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다 외롭게 산다.
오늘 몸에 있는 카메라를 뗐다. 잊힐 자유마저 없어지는 것 같아 주저했던 일이고, 왠지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 차마 떼지 못했는데, 디지털 치매라고 진단받은 오늘이 바로 그 날 같았다. 30년간 유지했던 라이프로그도 오늘을 끝으로 새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하나의 손실 없이 기록됐던 내 역사는 여기에 덮어두고는 찾아보지 않을 작정이다. 이제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좋았던 순간들만을 조합해 이기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소중함을 몰랐던 순간의 단순한 기록이 아닌 내가 그 순간의 주인공이 되는 기억을 만들 것이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설렘에 미묘하게 손 끝이 저려온다. 새로운 기억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