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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May 13. 2020

개구리, 모옌 (2009)

착하게 살게 하는 개구리

내가 읽은 첫 중국 소설책은 ‘사람아 아, 사람아’였다. 손이 스르륵 저절로 간 것은 아니고, 읽으라고 해서 읽었는데 사실 내용은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거라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게 손에 잡힐 듯한 캐릭터 묘사로 한동안 친구들을 매칭 되는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던 것 정도.


중국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은 전혀 아니지만, 읽고 나면 중국 작가들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소한 이름 탓이 이 인물 누구였지를 생각하며 책장 앞 뒷장을 연신 넘겨보게 되지만, 어느 정도의 관계도가 그려지면, 지지 부지했던 초반 속도를 잊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인형 나오는 부분이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처럼 느껴져 찾아보니 개구리를 의미하는 ‘와’가 어린애 혹은 인형과 발음이 같고, 아기 울음소리와도 비슷하며, 이 지역의 토템 역시 다산을 의미하는 개구리라고 하니, 음독과 훈독의 이중 세계인 중국어는 흥미롭다.


개구리. 그렇게 호감형이 아닌 제목만큼이나, 그리 유쾌하진 않는 내용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올챙이 관련 에피소드까지 더해져 읽는 내내 뭔가 미끄덩거리는 듯한 기분마저 드니 확실히 누군가에게 추천은 세모. (서점에 딱 한 권, 혹은 미입고 되어있을 때 쫌 눈치챘어야 했는데)


마라탕 면을 기대했는데 진라면 순한맛을 먹은 느낌이 이럴까. 화끈한 역사고발, 엄청난 소설의 4단계를 밟는 신랄한 비판적 소설인 줄 알았는데 그 밍밍한 내용이란. 아, 중국은 아직 이런게 허용되지 않지.


중국의 계획생육이 이처럼 처참하게 엄격히 지켜졌는지 처음 알게 되었고, 덕분에 우리나라의 ‘둘만 낳아 잘 살아보자’는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불과 30-40년 전에 진행됐던 국가정책이 불과 몇 세대 후에 출산율이 이 1명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소설 속 시간과 현재의 시간 격차보다 체감격차가 더 크다.

읽는 내내 ‘도대체 이게 뭐라고!!!’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도대체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당의 지침을 매뉴얼대로 집행한 고모를 향해 우리는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특히, ‘네 년이 아기를 낳지 않아 봤으니 이런 시술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악다구니를 듣는 고모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먹먹해진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네가 00을 안 해봐서 모르나 본대’류의 상대를 까내리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런 말을 하는 너님은 뭐 다 알고 하시는 말씀이신지)


마무리는 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인공이 아들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심지어 부인은 상상임신을 했다) 정말이지 이게 뭔가 싶을 정도. 되게 아닌 척 ‘이게  나에 대한 항변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썼던데 ‘엄청나게 그런 거 맞는 거 같은데’라고 반문하고 싶은 걸 보니 나도 참 프로 불편러.


차카게 살자


생명에 대한 죄책감으로 개구리 환영에 시달리는 정신병을 얻고, 낙태아의 인형을 만드는 고모의 말년을 보니 참 한 번 사는 인생, 일도, 명예도 다 좋지만,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착하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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