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말 할 수 없는 검은 꽃
김영하 작가의 책은 비교적 여러 권 읽었지만, 그리 큰 여운을 남지기 않았다. 그러나 알쓸신잡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여행의 이유>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후루룩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마주했다. 처음 알았다. 을사조약도 전에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절대 허구가 아닌 듯한 내용이라 읽으면서도 얼떨떨했다.
묵서가, 그러니까 멕시코로 가는 배 안에서의 조용한 혼잡스러움, 멕시코 농장마저도 무리를 이룬 (숨길 수 없는) 근면성실, 그리고 무지와 멸시 속에서의 귀국이라는 목표의식 등이 참 우리 진짜 대단히도 한결같다는 생각에 중간중간을 피식거렸다. 특히, 배 안에서 그 봉건적 사고가 유효하지도 무효하지도 않는 상황과 신부-무당-도둑의 기묘한 상황, 재미없는 노동의 적응과정은 매우 일촉즉발 이어 읽는 재미가 있었고, 이렇게 간결하게 호전적으로 써 내린 작가의 필력에도 미친 박수를 보냈다. 다만 타국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는 후반부의 과정은 앞과는 다른 느낌의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초중반부에 맡았던 진한 땀내를 넘어선 악취가 느껴지지 않아 몰입이 느슨해졌다.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젖힐 때마다 홀수선 아래의 화물칸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p.41)
평생 지평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이 벌판의 황막함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과 산 사이에서 태어나 산을 바라보고 자랐으며 산등성이로 지는 해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음을 깨달았다. 넘어갈 아리랑 고개가 없는 끝없는 평원은 그야말로 낯선 풍경이어서 사람들은 지평선이 주는 막막함과 공허로 뒤척였다. (p.92)
일종의 역사소설이라 생각이 되니 거시적으로 읽는 것도 매우 의미 있겠지만, 유랑하는 인간이고, 세계의 개인이고 뭐고 그냥 미시적으로 등장인물과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특히 나는 이연수 가족의 서사가 너무나 아쉽다. 이연수의 경우 물론 상황이 어쩔수 없었노라면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이건 소설이니까 그래도 배에 오르던 그녀의 마음가짐을 기억해보자면 걸크러쉬가 가능하리라 기대했는데 말이다. 뇌출혈로 오간데 없이 사라진 그의 아버지나, 이연수를 이해하지 못하던 신경쇠약의 어머니의 거취, 조울증을 반복하다 갑자기 통역으로 대성한 이진우까지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도 될만큼 강했던 캐릭터의 개성이 한 줄로 마무리 된 듯한 느낌에 특히 더 그랬다.
무엇을, 누구를
이 책은 마지막 장을 넘기면 반드시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게 정말 무슨일이람. 이 엉망진창 세계 속에 나는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고 무엇과 타협해야하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인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