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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Mar 19. 2019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2016)

우연이 아닌 안녕 주정뱅이

술은 어렵다. 맛도 어렵고, 숙취도 어렵고, 내 혀 짧아지는 주사도 어렵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앞에 무너지는 걸 보고 있는것도 어렵고. 참 여러모로 다 어렵다. 물론 나도 한 때는 친구들의 등에 들쳐멤을 당하는 대상이었고, 후배들에게는 술에 안주를 타(!) 주는 무서운 선배였으며, 집에 오는 길에는 누군가에게 전화해 우리 백 년 동안 행복하자면서도 행복을 본 적이 있냐고 횡설수설하는 소피스트였더랬지만. 아무튼 어느 날의 술자리 중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고 인마 짜식아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말은 왜 제정신엔 못 하는 거니란 생각이 드는 와중에 이 책을 집었다. 그래서 도대체 술을 왜 마시는 건데.



각 에피소드는 매우 현실적으로, 누군가는 죽고, 헤어지고, 잊히고 또는 잊지 못하고 그래서 어둡고 무겁다. 그 중 너의 없음이 나의 없음을 알아볼 때 우리는 서로를 떠날 필요가 없다는 신형철의 사랑론이 가장 잘 대입되는 <봄밤>. ‘만약’이라는 가정이 얼마나 허무하고 힘없는 말인지를, 그럼에도 흘러내리는 큰 슬픔으로부터 만약으로라는 말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가 내 마음에 옹골하게 들어왔다.


무거운 분위기때문에 마음은 힘들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정말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뭐랄까, 캬 이게 바로 연륜에서도 오는 바이브지 막 이런. (왜 이제야!) 모든 단편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잔잔한 메시지를 읽어 낸 그 감동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말 그대로 ‘따로 또 같이’랄까.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카메라,  p136)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실내화 한 켤레, p176)


어느 새벽에 만취해서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탔던 생각이 났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일이 없었는 어쩐 일인지 그날은 겁도 없이 남의 차를 얻어 탔다. (중략) 그녀가 태워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여 동승을 허락했다. 그런 일은 얼마나 쉽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가. (이모, p101)


어떤 일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쉽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 그 일은 결국은 어느 시점의 어느 한 부분의 단단한 필연이 되고 만다. 틀림없이 꼭,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내 마음에서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안녕 주정뱅이


주정뱅이가 될 자격은 없지만 어쩌면 이 책을 통해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괴..괴..괴로움이랄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책의 이해를 풍부하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책 뒷부분의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건 뭐 마치 문제집 뒤의 해답지와도 같았다. 문학적 해석을 가미한 매우 인류애적 해석이랄까. 해답지(!) 중에서도 가장 공감했던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발췌해 이 책을 마무리한다. 안녕, 주정뱅이!


그러므로 위로를 할 때는 이런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예컨대 '그는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나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같은 말들을 내 쪽의 끝을 놓아버리면서 던지는 밧줄이다. 반면에 '당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알겠어요'와 같은 말은 한쪽 끝을 쥐고 던지는 밧줄이어서 상대방이 믿고 붙잡을 수 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말만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지만 달리 말하면 이것은 막연한 '거예요'와 분명한 '알겠어요'의 차이이기도 하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어야 한다는 말은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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