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 일상으로부터 8,232 km
시간 약속에 엄격한 편이다. 회사 최종면접 질문 중 하나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느냐' 였는데, 그 대답을 '시간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했으니 말 다함. 내가 기다리는 것도 싫고,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 헐레벌떡 급하게 약속 장소로 가는 내 모습이 싫다. 허둥지둥 가다가 뭐 흘린 건 없는지 쎄한 느낌도 그렇고, 기다리면서 뭔 생각을 할지 덜컥 내려 앉기도 하고, 뭐랄까 게을러서 진작 준비 못한 후진 내 모습이 들켜버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늦어 버렸다. 정말 살면서 몇 번 없는 일이 어처구니없게 이 곳에서 일어나 버린 것이다. 여행의 시작, 예정되어 있는 몇 개의 액티비티 중 처음이었던 스노클링이었다. 남들 다 하는 건 노잼이라며, 물에 들어가는데도 옷이 안 젖는다던 드라이 슈트를 믿고 물개 박수를 치며 통 크게 예약한 것인데 이렇게 대차게 늦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약되어 있었던 지각이었다. 여행 첫날이라 생활이 아직 몸에 익지도 않은 상황에서, 새벽에 잠 깨서 수다 떨어, 점심 도시락 싸(메뉴는 주먹밥. 무려 계란 프라이랑 스팸도 구움), 하다 하다 아침에 레이캬비크 산책에 빵집 들러 빵 사고, 카페 들러 커피도 마시고 왔으니 아쉬움이 남을 것도 없어 보인다.
(사실 빠듯하게라도 되게 엄청 제대로 왔는데 마지막에 내비게이션이 길을 잘 못 알려줬고, 다시 찍은 구글맵을 보고 가다가 표지판 해석을 잘 못 해석 -여기는 차는 못 들어가나 봐요, 말horse만 들어갈 수 있나 봐.. 같은 놀랍게도 조선시대 같은 풀이- 해서 U턴을 해 버린 멍청미의 한 스푼을 더한 게 직접적인 이유임을 밝힌다.)
우리는 뛰었다. ‘왔노라 보았노라’며 온갖 의미부여를 해도 모자란 첫 장소의 감탄은 오간데 없는 경주마였다. 달리기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하루키 생각이 난다. 정확히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는 거다. 솔직히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이 작가를 선호하지 않는다. 혹시 소설을 읽으면, 혹시 산문을 읽으면 마음이 달라질까 했지만 글쎄다..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근데 아이러니하게 하루키가 생각나버렸다. 아무튼 ‘싱벨리어에서 달리기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느긋한 곳에서 달리고 있는 오직 하나뿐인 우리를 (길 찾는) 보물 찾기에 신난 중학생쯤으로 봐주기를, 그리고 제발 우리를 버리지 않고 모임 장소에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것.
_지마
없다!!!! 없어!!!! 만남 장소에 아무도 없다!!!! 좌절할 새도 없이, 1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했다. 수많은 여행을 했지만 이렇게 ‘may i beg your pardon?’으로 시작하는 클래식한 구걸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코리안 여행객이고, 애즈 유 노 거기는 여기서 정말 멀리 떨어져 있잖아. 아 그럼그럼 우리는 물론 프롬 thㅏ우스 코리아야. 그런데 우리가 늦어서 정말 쏘리한데, 혹시 오늘 다른 시간에 남는 자리가 있을까? 3시간 후쯤에 있다고? 아 진짜 좋지! 바꿔줄 수 있어? 와 진짜 너는 앱솔루트리 에-인젤angel이야, 우리에게! 아이 오owe 유- 그라시아스 무쵸! 아미고!
마침내 싱벨리어가 눈에 보였다.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광활하지만 아늑한 녹색의 그곳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1-2시간 남짓 머물다 간다는 그곳에서 반나절쯤을 보낸 것 같다. 계획에 안달 내는 나, 돌발상황을 더위보다 싫어하는 나임에도 3시간의 딜레이는 지루하지도, 마음이 조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감탄과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과 행복, 안도감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중요한 순간마다 운이 좋게도 제 시각대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있던 게 분명하다. 인생에서 이렇다 하게 지각해본 적이 없는 아주 순탄한 열차였다고 할까. 어느 구간에서는 느려지기도 하고 어느 구간은 급행처럼 빨랐지만 분명히 나는 결코 늦지 않는 평균 속도이상의 열차를 타고 있었다. 내 속도에 익숙해지다 못해 이렇게 조급해져 버린 것일까? 그들의 리듬대로 움직이지 못해 안달 내는 내 모습에, 최근엔 아주 정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스스로가 지겨운 나는, 그리고 각자의 사연으로 조바심을 갖는 우리는 ‘늦어져도 괜찮음’을 다시 한 번 배운다. 생각한 바에서 조금 어긋나도 금새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법, 도전하는 법,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법,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를 처음보다 더 기쁘고 즐겁게 느끼는 법 그리고 이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마치 이 것이 처음인양.
가슴이 뛴다
한 끗차이다. ‘첫 단추부터 이러다니 이번 여행 호락호락하지 않겠다’가 아닌 ‘더 즐기라고 일부러 삐끗 한 건가’가 되는 건 말이다. 뛰어야 하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금 늦었다고 해서 내 탓도, 누구의 탓도 하지 말고 다시 뛰어보는 거다. 그럼 또 나는 가슴이 뛰겠지. 결국엔 다 잘 될 거니까라는 근본적인 낙천주의와 벅차게 쿵쾅거리는 이 느낌만 가지고 가면 된다. 게다가 나에게는 어떻게 하냐고 발을 동동 구르지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호들갑x유난콤보를 날리지도, 이게 지금 누구의 탓이냐며 시시비비를 가리지도 않는, 뭐 이런 일이 대수냐고 의연하게 버텨주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저런 가벼운 몸짓은 나의 몫으로 남겨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안 되는 건 없지,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과 함께, 심쿵하는 달리기라니. 모든 게 미라클인 첫 스텝부터 가슴이 뭉클해 오는 게 역시 이 여행 덥석 물길 잘했지. 같이 가자고 뻐꾸기 날리길 너무너무 잘했어. 앞으로의 추억과 시간을 통해 배우는 감정이 희미해지지 않게 일상에서 자주 꺼내 비춰야겠다는 구태한 말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