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i Sep 27. 2019

이 도시에서 마신 여러 잔의 커피

day7. 행복은 커피로 쓰세요


‘옆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앉을 때 로맨스는 피어납니다’


 도서관에서 자리 맡지 말자는 내용의 이 자보의 제목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던 기억이 있다. 인생은 독고다이라는 말보다, 자리 사석화 금지라는 말보다 얼마나 따뜻하고 낭만적인가! 게다가 피어나기까지 한다 하니 문학성까지 두루 갖춤은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에서의 로맨스는 끝장날 것 같은 당위성까지 갖춰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까지 혼자 있지 못했다. 2만학우라는데 그래도 0.5%쯤은 친구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다소 깜찍발랄한 생각을 했기에, 쉼 없이 대학 캠퍼스를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그래서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한동안 방황을 했던 것 같다. 혼자 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선물처럼 주어진 마지막 하루. 레이캬비크에서 여유 있게 마무리하는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지금 놓치면 꽤 여러 날을 후회할 것 같은 '서부'로 향하기로 했다. 첫날부터 찜해두었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말이다. 어차피 이 도시는 잠들지 않을 테니 오전의 얼마간은 카페 한두곳 가는데 써도 될 것 같았다. 여행에 와서는 지구가 내일 종말할 듯한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굳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커피는요?'라며 챙기는 이 사람들이 나는 마음이 찡할 만큼 좋다. 마지막까지 매 순간이 행운이라 느껴질 만큼 쨍한 날씨에 이제는 아주 근사한 팀이 되어버린 좋은 사람들이라니, 계획되어 있지 않은 의외의 이 루트는 더할 나위 없으리라. 이 여행은 반드시 해피엔딩이리라.



 - Reykjavik Roastery

 이름부터 절대 놓칠 수가 없다. 힙한 향이 공항까지 솔솔 불어온다. 이 곳에 왔으면 이 커피는 당연히 마셔야 한다고. 계획상으로는 '3 coffees to go'를 말하고 이미 차에 탔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냐면 커피를 마시면서, 책장을 넘기면서, 카메라 필름을 돌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볕을 느끼면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LP판도 뒤적이면서, 흘러오는 나오는 음악에 이유 없는 나른함을 느끼면서 그냥 그 묵직한 산미 향이 나는 그 공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 곳에서 테이크아웃이라니 또 돌아가 얼마나 아쉬워하려고. 식어버린 라테마저 감동스러웠던 감격의 잇플레이스.

누리지 않고는 몸이 뒤틀릴 수 있는 이 곳



- Mokka Kaffi

 이 녀석이 우리를 레이캬비크 카페투어로 다시 소환한 것이 분명하다. 라떼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6월에 눈보라가 쳐도 이 카페는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수개월을 참았지만, 도착해서는 1분도 지체할 수 없어 도착 다음날인가에 바로 달려간 곳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넉넉한 후드를 끼얹고 오전을 보낼 책 한 권 가볍게 들어 이 카페의 문을 열 수 있다면 기꺼이 나는 모든 주말을 여기에 헌납했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만큼 풍미도 분위기도 깊었다. 내 도시에 우후죽순 생기고 있는 카페들도 비단 인테리어로 승부보려 하지 말고, 오래 지키고 싶은 가치가 깊숙이 배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1분 1초를 꾸욱 눌러 담았다.

하마터면 점심까지 있자고 말할 뻔 했다.



- TE&KAFFI

이왕 레이캬비크 카페에 발 담군 김에 간 곳은 메인스트리트에 있는 아이슬란드의 스타벅스라는 이 곳이다. 말 그대로 티와 커피를 파는 곳인데, 주민들이 아침부터 후딱 들어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는 걸 보니 이 나라 버전의 스타벅스 인정. 마일드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딱 펴는데 말 그대로 페이지의 모든 구절이 내 마음을 사정없이 노크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이유, 김영하)
이런 곳이 지천에 널렸다면 당연히 독서량은 올라갈 수 밖에



- Kaktus Espressobar

복잡한 일방통행 속에서 눈에 띈 그리너리한 (신상) 카페. 심지어 사람들도 제법 바글바글, 분위기도 사알짝 시끌시끌하니 들어가는데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라떼로 배불뚝이가 되어버렸음에도 그린티라떼 (초지일관 그린그린)을 시켜 볕을 쬐다 보니 나 역시 이 구역의 힙쟁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이 심심해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잡지를 들었는데, 한 장을 넘길수록 우리는 불현듯 박수를 치면서 매우 격한 공감을 했고. 결국 서로의 동의를 구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여긴 한마디로 잡지맛집!

you must go on a long journey before you can really find out how wonderful home is


카페가 시작된 이유


 시간이 갈수록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그래서 나는 빨리 어른스러워지고 싶었다. 그러면 힘든 일이 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생각날 수 있을 것이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댈 수 있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릇 어른이라면 혼자가 되는 시간도 의연하게 보내야 하는 것이기에, 외로움도 다룰 수 있어야 하기에 의도적으로 홀로임을 자처했다. 카페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혼자 무언가를 하며 그럴듯하게 시간을 보내는 어른같은 내 자신이 좋았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옆자리에 누군가가 있기를 -그 사람 역시 이런 따뜻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나를 보았다. 이 푸른빛의 시간과 너른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때 가장 나다워질 수 있구나. 비로소 나다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안심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좋아해 준다는 걸 배웠다. 이 정도라면 뭐 카페는 보리수나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혼자여도 좋고, 함께여도 좋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문제에 더 이상 마음을 쏟지 않기로 했다. 혼자를 자처하기도, 그렇다고 함께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냥 물 흐르듯이 가만하게 순간순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랬더니 안절부절못한 마음이 잠잠해진다. 역시 이상한 걸 고집 피우다 소중한 ‘나’를 잃을 뻔했다. 서로의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만으로 시공을 공유한 그 별 볼일 없는 순간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카니발스러웠던 파괴적인 순간들도 그냥 다 나인 것을. 그래도 이제는 뒤돌아봤을 때 그래도 후회가 적을 의미 있는 새로운 모먼트들로 나를 행복하게, 우리를 따뜻하게.



 우리는 이제 다시 채비를 꾸려 또 아무런 계획도 없었던 서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일어선다. 카페 투어까지 완벽하게 미션클리어 해버리다니. 잠시나마 테이블을 공유하고 저마다의 나래를 펼쳤던 개인이었지만 다시 혼자가 아닌 시간의 시작에 설레는 걸 보니 역시구나싶다.


 어서 가자, 해피엔딩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