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i Mar 31. 2020

나도 선배는 처음이라

March 2020


한 때 내 희망사항은 ‘선배가 되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아는 것이 매우 드문 저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각종 복지, 사건사고, 서무 관련 업무를 쳐내느라 정신없이 8+a의 시간을 보내고 퇴근을 할 때면 ‘아, 나도 빨리 선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산적한 잡동사니 따위는 훌훌 털어버리고 정확히 어떤 업무인지는 몰라도 그냥 간지 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그런 업무를 맡으면 회사생활이 더 신나질 것이라 생각했더랬다.




나 : 야, 우리 부서 애들은 그래도 되게 착해. 말도 잘 들어주고, 이런저런 얘기도 잘하구 그래.

친구 : (한심하게 쳐다보며).. 그냥 들어주는 척하는 거야. 이거 꼰대가 다 됐네



아마 그때 처음으로 의심해보지 않았던 분야의 문이 열린 것 같다. 꼰대로 가는 길. 이렇게 나는 선배가 되었다. 막내 업무도 모두 떼고, 심지어 신입사원 면접도 가고, 교육도 하는 그런 중고사원이 되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막 신나진 않다. 어느 때 등을 토닥여줘야 할지, 언제 두 팔 걷고 나서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떤 선배가 되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막연히 선배를 꿈꾼 자의 현실은 고독하다.


그러니까 난 ‘의지가 되는 좋은 선배’이고 싶다.


물론 마음 같아선 일도, 처세도 완벽하고 싶지만, 나에게 처세 DNA는 아쉽게도 존재하지 않으니 일로 정점을 찍어야 하는데 그럼 인간적인 면이 걸린다. 그럼, 또 튀지 말고 둘 다 적당히 하라고 하겠지? 근데 적당이라고 하는 미적지근한 말은 이미 이번 생엔 거의 오답 수준이다. 그냥 내편 같은 선배, 잘 모를 때 물어보면 적어도 틀린 답은 말하지 않는 선배, 쓴소리 하긴 해도 같이 가자고 손 내미는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좋은 것은 처음으로 공유하고, 짜증이 나 응석 부리고 싶어 퇴근길에 이모티콘 하나 날려도 되는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의지. 내가 의지하는 누군가를 생각할 때 어느 때고 언제나 흐뭇해지는 걸 보니,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도 이게 맞는 것 같다.


그러려면 난 이제 일도 잘해야 되고, 생각도 깊어야 되고, 감정도 잘 다스릴 줄 알아야겠지. 나도 선배가 처음이라 그래라고 말 할 수 있는 정직함과 친밀함도 가져야겠지. 그래도 가장 쉬운 한 가지는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내 지갑부터 여는 거. 다 두루와 두루와.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남이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