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행의 시작엔 예고가 없다
새벽 4시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더니 도무지 감겨지지 않고, 들어올려진 내 광대는 절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가 나에게 처음으로 고생했다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안겨 주었던 선물을 개봉박두 하는 날이다. 서른 살, 언제까지 누구와 함께하는 여행을 할까 싶어, 멋지고 따뜻한 여행의 독립을 꿈꾸며 떠나는 여행이다. 내 잇몸이 활짝 만개한들 어떠하리.
여행의 서막에서 중요한 3가지 포인트
포인트 1,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공항리무진을 탈 때 : 너희 일할 때 나 놀러간다는 놀부팥쥐 심보
포인트 2, 수속을 마치고 스타벅스에서 아바라를 사서 딱 들이킬 때 : 일종의 허세인데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음
포인트 3, 비행기를 딱 탔는데 내 옆에 뙇! 잘생긴 오빠가 있을 때 : 드라마 중독자의 로맨스
포인트 원,투는 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마지막은 100% 타의적인 것이라서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무려 올 때 갈 때, 내 옆 자리 아무도 안 탄 역사도 있다. 왕복 중 1회는 가능하겠지만, 올 때 갈 때 아무도 안 앉는 것이 가능할까? 무려 비행기에서? 아무튼 난 그 때 내 옆에 앉을 (훈훈할) 그를 위해서 쪽지를 써 그 쪽으로 몰래 흘릴 용의주도함도 갖추고 있었는데 말이다.
12시간짜리 이번 비행에서 나는 누군가의 옆자리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다행히도 남자였고, 불행히도 외국인이었다. 심지어 영어를 잘 못하는, 4음절 중 1번은 꽈뜨로를 말하는 스페인 사람. 올라 ^.^ 한번 말하고선 우리는 11시간 59분을 완벽하게 남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 나는 왜 드라마를 그렇게 많이 본 것일까. 빌어 먹을. 로맨스는 너 다 가지세요. 너라도 행복해지세요.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기내에서 영화 암살을 보고 왔더니, 마치 여행을 하정우와 온 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다는 것이다.
여행의 시작
"으악 이 치약 왜 이렇게 매워"
샴푸를 살 때 딸려 받은 휴대용 치약. 아싸! 이거면 이번 여행에 충분하겠다 싶어 제일 먼저 챙겨 놓았는데, 너무 매워서 입안이 다 아려왔다. 아니 뭐 이런 치약이 다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나는 '여행왔음'을 느꼈다. 이국적인 풍경에서도, 슈퍼에 써 있던 약간은 어색한 화폐단위에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지폐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 감정의 느닷없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아 여행왔다! 드디어, 결국, 비로서, 마침내 왔! 다!'
왜인지 모르겠다. 알고보니 작게 strong이라고 씌여있던 그 치약에서 느낀 이유를. 역시 모든 일에는 역시 예고가 없다. 그 예고 없음이 나를 설레게하는 거겠지. 그대가 처음 내 안에 들어왔을 때/그 예고없음처럼/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예고없이 마주치고 싶다던 구영주 시인의 시 처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1일동안의 여행에서 나는 더 많은 예고 없음에 당황해 하고 설레할까. 오랜만에 느껴지는 이 두근거림이 좋다.
옆 자리 사람과의 로맨스도, 끝까지 함께할 동행인도, 그렇다고 완벽할 여행계획도 없었지만 나는 고작 매운 치약에 설레하며 여행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