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하지 않는 법

6화. 마음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주어야 한다.

by sunnyi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이지 않을까 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고, 따라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벨기에 브뤼헤. 유럽에서도 가장 유럽스럽다던 그랑플라스에서의 신선놀음도 나쁘지 않았기에 꼭 가야하나 생각했던 곳이 바로 브뤼헤였다. 그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던 그 곳에서 나는 천국을 보았다.


키가 컸다면 더 즐거웠겠지. 부끄러움은 나의 몫 @brugge, belgium
여행의 8할은 써니한 날씨다. @brugge, belgium

이 천국 속의 자전거는 신의 한수였다. 후기의 대부분이 '브뤼헤에서는 꼭 자전거를 타세요' 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타고 싶지 않았다. '싫은뒈? 나는 내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유유자적 한량처럼 떠돌고 싶은뒈?'라고 본능적으로 눈 치켜 뜨고 냉소적인 미소와 함께 마우스를 스크롤 다운 하던게 나였다. 하지만 남들 하는 대로만 하면 절반은 간다고, 빌리기 참 잘했어요 도장 꽝! (다리 길이가 안 맞아서 -내가 너무 짧아서- 초반에 매우 고생했던 것은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미화할까 한다. 더불어 울퉁불퉁한 돌길질주의 느낌도 엉덩이 경락쯤이라고 생각하고 고이 간직하기로)


아마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 건치를 자랑하며 신나했던 것 같다. 그냥 보통의 날에 보통처럼 보통 친구를 만났는데, 갑자기 '오다 네 생각이 나서 주워왔다'며 가방 뒤적거리며 꺼내는 석고방향제쯤에 심쿵하고 가슴 찡해 지는 것 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뭔가로 가득 차 있는 선물같은 느낌, 시간이 갈 수록 내가 더 가득 채워지는 그 느낌은 정말 언제든 환영하는 감정이다.


모든 것은 기대가 문제다.


나는 항상 기대를 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매우 크게 기대했었고, 나의 그 벅찬 기대를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대에 적잖이 설레 했고, 즐거워 했고, 행복해 했고, 그만큼 많이 우울해 했다. 사실, 기대는 기대일 뿐이라는 건 눈치채버린 건 오래 전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눈 감았는데 기대의 배신에 매잔 몸둘바 모를 때면 진작에 받아들여야 했다며 가슴치며 후회를 한다.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대를 믿으면 안 됐는데. 바보같은 내 모습에 속상해서 또 연락 할 누구 없을까 SNS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더 바보같다. 너라면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외롭고 쓸쓸한게 아닐까(정현주/거기,우리가 있었다)라던데 내 모습이 바로 딱 그렇다.


술도 기대 없이 마셔서 그런가 더 기가막힘 @brugge, belgium


회사생활을 풀뿌리처럼 질기게 견뎌내고 있는 나는 사뭇 진지하게 내가 정말 관심갖고 있는 카테고리는 무엇일까 생각 한다. 남들이 하니까, 남들의 기대를 무너뜨릴 수 없으니까 해 왔던 것들에서 더 이상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왜 업무에 몰입하지 못하냐고 스스로를 채근하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 그런데 더한 문제는 다른사람들의 눈을 무서워 이 가짜 옷마저도 마냥 훌렁 벗어 제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용기부족.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유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다 갖고 싶은 내 욕심과의 싸움에서 용기는 언제나 져버리고 만다. 으이구, 질 껄 알면 고민이나 하지 말지, 조울증도 병이다. 병이야.



진짜가 아니라면 또 어때, 내 마음이 시들지 않도록, 말라서 갈라지지 않도록 꾸준히 물을 줘야지. 그러다 보면 가끔 쏘나기가 떨어져도 이것쯤이야 할 수 있는 단단함을 갖게 되지 않을까. 아! 이걸 심어도 될까 하는 머뭇거림보다는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은 덤이다. 해보자! 마음은 실력이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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