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라는 것

7화. 용기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by sunnyi

여행가기 직전, 충격적이게도 오렌지 알러지가 생겼다. 유난히 얼굴에 트러블이 심해 역추적해 본 결과 오렌지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급부상했는데, 검증을 위해 다시 한 번 먹어볼까도 했지만 왠지 불안해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가기로 했다. 신 과일을 잘 못 먹는 나에게 거의 유일한 시트러스였던 너, 잘 가라, 어륀쥐.


덕분에 반고흐 미술관 옆 (진흙)잔디에 앉아 오렌지가 아닌 파인애플과 멜론과 우유와 사과주스를 마시는데 내 머리 위로 벚꽃이 날렸다. 내가 오기 사흘전까지 궂은 날씨라 이런 건 기대도 안했는데 아직 안 졌구나. 고마운 벚꽃. 주말에 비바람이 예정되어 있으니 벚꽃구경 빨리 다녀오라는 라디오 뉴스가 민망하던 월요일 출근길, 아직 생생한 벚꽃들을 보며 빗 속에도 살아남았다며 아주 질긴 것들이라고 서울 벚꽃에게는 욕을 했는데, 그 곳 벚꽃에게는 고맙다니, 갑자기 자비로워진 느낌이다.


hello! have a nice milk @amsterdam, netherland
아 곳곳이 꽃이라 설렌다 5월의 맛 @amsterdam, netherland

'여유'와 '감사'.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4일동안 가장 많이 생각한 두 단어다. 아마 두 단어의 상관관계를 보자면 여유에 대한 감사겠지. 벨기에에 있을 때에는 '행복'이었는데-아마도 그건 '떠남'에 대한 '행복'인거 같다- 반해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고 해야하나. 행복의 다음 스텝이 여유인가? 아무튼.


여유[여유] 물질적/공간적/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 남을 여에 넉넉할 유 / 그리고 영어는 딱히.. enough 혹은 much 정도가 되려나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항상 다짐했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여유를 갖지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구매 위시리스트는 언제나 차고 넘쳤기에 물질적으로는 매번 부족한 느낌이었고, 공간적인 여유는 무언가로 덕지덕지 채워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인 여유는 역설적이게도 주중=회사에서는 내가 뭐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바빴고, 주말=집에서는 바쁘기 위해 아둥바둥 거렸다.


내 머릿속의 점검, 집계, 보고도 전혀 되지 않은데, 시간 맞춰 보고하려니 기분 좋을 턱이 있나. 내 기분은 좀처럼 리뉴얼되지 않는데 제품 리뉴얼은 쏟아지고, 스케줄에 정신이 없으니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단 몇 일 만에 이렇게 인간다움을 되찾은 걸 보니 떠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걸 보면 감탄사만 나온다 @amsterdam, netherland


암스테르담은 너무 여유로워서 낭만적이었고, 낭만적이어서 여유로웠다. 여행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한데 만나 북적여 감사했던 곳도 암스테르담이었고, 북적임 끝 잠시 찾아온 외로움도 즐거웠던 곳도 암스테르담이었다. 흰 우유마저 맛있었고, 꽃시장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곳곳이 꽃이라서 은근히 흥분되기도 했다.


트램타는 것도 아까운 마음이 들어 하루종일을 걸어다녔다. 운하와 유람선 구경도 매번이 처음인양 구경했고, 이 집이 저 집같고 저 집도 이 집같은 빽빽하게 서로를 의지하고 서 있는 집들도 언제나 두근거렸다. 4km쯤 떨어진 카페나 서점은 오히려 걸을 수 있어서 좋기까지 했다. 이 여유. 서울에선 생각하기 힘든 이 여유. 400m 앞 은행도 평일에 가려면 눈치보이고 그랬는데 4km라니. 자그마치 10배 차이인데 100배는 마음이 편하다.


영어서점에서 봤을 때부터 찜뽕 @amsterdam, netherland


의도적으로라도 떠나야한다. 잠시 벗어나야한다. 사는대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루틴에서 벗어나 엑스트라 올디너리가 필요하다. 아 내가 언제부터 여행꾼이 되어버린 걸까? (되라는 사랑꾼은 안되고 말이다)

항상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까 생각하는 나를 보면 뭐하는 인간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주여행을 하고 나서라도, 언젠간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꼭 돌아올 예정이다. 서른 첫 여행, 마음을 열었던 이 곳으로, 여유의 리뉴얼을 위해서.


매거진의 이전글기대 하지 않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