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고생 끝에 온 낙은 달다.
나에게 디데이란, 말 그대로 비상처방. 몇 일만 기다리면 된다는 일시정지.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성 진통제랄까. 익숙하지 않는 하루를 견디게 하는 몇 안 되는 고마운 것이었다. 대학생 때 첫 유럽 여행에선시간 별로 아침 점심 저녁까지 정해진 완벽한 생활계획표였는데(심지어 그 엄청난 일정을 무지 잘 지켰다는 건 자랑.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절해서 이륙 전에 잠들어서 인천 착륙에 눈 뜬건 안 자랑), 한 해 두 해 갈 수록 "이 곳들만 가면 다 본 거지 뭐"라며 그냥 발뻗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카페나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밥은.. 철저하게 현지식으로. 아, 스타벅스는 안 가면 섭섭하다.
뼈대는 튼튼하고 살은 그럭저럭 붙어 있던 나름 국산 참조기같았던 이번 여행준비 중에서도 가장 이동이 많아 긴장됐던 체력극한의 날. 그 날 나는 나의 열정에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하루에 3개의 도시(바르셀로나-그라나다-말라가)를 가는데 새벽 6시에 비행기 한 번, 오후 6시에 버스 한 번 타는 뭐 그 정도. 먹는 건 아깝지가 않던데 교통비는 왜 그렇게 또 아깝던지, 먹던 시리얼과 납작 복숭아까지 야무지게 챙겨 걸어나서는 멋진 삽십대 언니들. 카메라를 아침 사과처럼 시도때도 없이 꺼내어 찍고, 초콜렛이 녹아 문드러지더라도 가방에서 뺴놓을 수 없던 당에 예민한 삼십대 언니들. 오 주여 저에게 아직 이러한 열정이 있나니, 저를 버리지 마소서. 아멘
우리의 열정에 하늘이 응원해준건지 날씨가 너무 좋았다. 정말 날씨가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유난히 하늘을 많이 쳐다 본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 하늘을 군데군데 가리는 그라나다의 차양막이 참 좋았다. 깨끗한 것도 아니고, 색도 그다지 곱지 않았는데도 흔히 보지 못한 풍경이라 그런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차양막에 이유없이 설렜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그 차양막들이 드리운 길거리를 걷는 순간마다 모든 것에 감사했다. 여행이 벌써 중반인데 아직도 이걸 보고 있는 내가 믿겨지지 않는다.
원래부터 미디엄 레어가 아닌 미디엄 웰던인 내 피부가 빼도박도 못하게 웰던으로 타버린 건 왠지 마음의 빗장이 헐거워졌기 때문인듯 하다. '너 얼굴 많이 탔다'라는 말이 듣기 싫어 여름에는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던 내가 온 몸으로 햇볕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여행 왔는데 얼굴 좀 타면 어때'라며 살갗이 따가운게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까. 미래에 대한 생각-내 의지로는 1도 변하지 않는-으로 현재를 홀대하는 나에게서 벗어나 여기 이렇게 있는 나의 지금을 즐기기로 했으니까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값진 결과를 도출 하게 하는 원동력은 '성취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마음 먹고 하면 이룰 수 있구나,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쫄래쫄래 따라오는 자신감이 또 다른 도전, 다음 번의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성취감'을 느낀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를 생각 해 보면 괜시리 마음이 숙연해 진다. 물론 환경의 문제, 나의 문제가 복합적이겠지만 말이다.
피곤해서 뭐 제대로 느끼기야 하겠어 싶었던이 고난의 행군 데이에서 왠지 모를 열정과 성취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오지를 다녀왔던 사람들이 보면 엄살이 쎄다 싶겠지만 그래도 난 왠지 뿌듯했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 대수냐고 생각들 하겠지만 반가웠다. 나는 그냥 주어진 것만 하는 아바타인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도 내가 보고 싶고, 하고 싶고, 또 같이 갈 옆에 누군가가 있어준다면 할 수 있다구! 이 녀석들 어디에 있었던 거야,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알함브라 보겠다고 새벽 3시부터 일어나 분주했던 우리에게 줬던 그라나다와 말라가의 미소가 벌써 그립다. 짜서 밥알을 못삼켰던 리조또, 너무 달아서 입술이 쩍쩍 달라붙었던 치킨, 30도인데 냉커피 없다고 해서 얼음과 물로 셀프 제조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먹고 웃었다가 왠지 더러워진 기분이 든 오징어먹물 빠에야, 포크를 못 얻어 와서 손으로 집어 먹었던 화이타, 비싼거 같아서 못 먹었던 콜라까지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그 때. 경이롭기까지 한 알함브라 나스르 궁전에서 '어떻게 이런걸 만들었을까'하고 묻는 언니에게 '쪼면 다 나와'라고 로맨틱하지 못한 5자 답변을 한 내가 미울뿐이다. 어짜피 틀린 말도 아니라는 걸 아는 6년차들이니까 실컷 웃었으니 됐다. 돌아갈 날이 정해져 있는 여행이지만 이 곳에서만큼은 쪼지 말고 천천히, 깊게,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