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11화. 말하지 않아도 안다.

by sunnyi

20일 남짓의 여행기간에 내 머릿속에 '행복'이란 단어가 떠오를 때면 당장에 메모장을 꺼내 그 순간을 적었는데, 돌아와서 세어 보니 총 94개였다. 대략 하루에 4.5번정도는 행복하다고 느낀, 행복에 헤픈 나였는데 돌아와서는 단 하나도 적어넣지를 못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남짓은 행복했던 것도 같은데 적을 시간도 없이 바빴는지 아니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행에서 돌아온지 50일이 지나는 지금까지 스코어는 0.


그랬던 웃픈 감정소멸자의 생활 중에서 지난 주는 참 오랜만에 말로는 도저히 표현 되지 않는 뭉글거리는 감정을 느낀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덥지 않은 말만 잔뜩 늘어놓고, 심지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내 주변의 공기가 공기가 훈훈해지는 순간의 느낌들. 마음이 짠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꾸욱 잠궈 놓고 있는데, 문득 마드리드로 떠나는 나와 세비야에서 반나절을 더 보내야 하는 언니의 마지막 포옹이 생각났다.


골목 골목이 모두 아트다 아트 @sevilla, spain


세비야는 처음부터 코메디였다. 버스에 타서 기사아저씨한테 목적지 주변에서 내리는 걸 확인 받는데 몇 번 아이폰 주거니 받거니했고, 타면된다는 눈사인이 났다. 3유로 동전을 버스 티켓이 나오는 기계구멍에 얌전히 넣어두고-신기하게 그 구멍에 1유로 동전 3개가 나란하게 딱 들어갔다- 아저씨를 처다봤더니 세상 뭐 이런 똥강아지를 봤냐는 듯 산타클로스같은 눈빛과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ㅎ ㅏ .. 정적이 3초간 흐르고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 21번 버스 안 승객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거리기에 바빴다. (스페인에서는 버스비를 그냥 기사에게 주면 된다. 마치 현금으로 택시비 내듯이) 이빠이 스미마셍.


지금 안 사면 영원히 못 산다
난 써니라고 하는데 쓰는 건 마음대로 @sevilla, spain


다른 사람들은 이 고즈넉한 도시와 3초만에 사랑에 빠져서 헤어나올 비상구도 없다는데, 우리는 12시간만에 빠져서 72시간 안에 비상구를 찾았다. 생각보다 너무 더웠던 탓인지, 여행의 후반탓인지는 몰라도 극찬만큼의 매력은 글쎄 노코멘트. 그 와중에 열과 성을 다했던 것은 몇 번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터질 것 같지만 터지지 않는 트렁크의 노고에 대한 찬사와, 스페인에서 안 사가지고 가면 바보 된다는 몇 전리품을 위한 쇼핑이다-고는 하지만 산 거라고는 백팩과 쪼리. 아 내가 생각한건 이런게 아니었는데-. 그래요, 저희가 신혼여행이 아니라서 그래요. 너희는 동정금지, 우리는 좌절금지.


두 번 세 번 추천하는 이 곳의 야경선물 @sevilla, spain


그래도 잇 플레이스를 꼽자면 나는 22시쯤 메트로 폴 파라솔에서 본 야경, 언니는 23시쯤 도착했던 야밤의 스페인 광장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와- 하는 탄성은 없었지만, 세비야 대성당 야경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찾아온 기시감은 무섭고 닭살돋기 보다는 내가 여행을 온전히 즐기고 있음에 안도하게 했고, 루프탑 카페에서 대성당을 바라보며 양말 벗고 앉아 발가락 사이의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었던 시간은 제법 멋진 bon voyager가 된 듯 한 느낌을 받기엔 충분했다.


이제 우리의 신대륙을 찾아서 @sevilla, spain


언제나 마지막은 아쉽고 아련하다. 우리 둘의 마지막 여행날 밤. 언니-나못지 않은 감성꾼-가 한국에서부터 모셔 온 ♥U촛불을 켜고 여행을 함께해서 좋았고 지난 5년동안 수고 많았다며, 앞으로도 잘 해보자고 어색하면서도 진심으로 서로를 응원하는 순간에 나는 감상적이지 않으려 정말 고생했다. 매분 매초마다 그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울며불며 통화한 적도 있었고, 다 놓아버리고 주어진 하루에만 열심히 살자고 한 적도 있었고,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나에게 실망한 눈초리를 볼까 두려워 숨은 적도 있었다. 어려서 많은 부분이 미숙했던 나부터 제법 노련해진 지금의 나까지 지난 5년이 희미하게 흔들거렸는데, 아마 정말 이 동기들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란 건 변함이 없었다. 이직을 하고 싶어도 이런 동기들이 없이는 세렝게티 같은 회사생활을 제대로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주저했던게 바로 바보 같은 나니까.


여기서 행복할 것

작별의 순간은 언제나 낯설다. 돌아가서 보자며 했던 포옹도 부자연스러웠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우리 사이에 왠지 백만 스물 다섯개의 실이 생겨 버린 느낌을 말로 설명하기에는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핑 도는 눈물을 또륵 흘리면서 이 추억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하는 것도 너무 신파적인 것 같고, 그렇다고 감정이 앞서는 내가 그걸 숨긴다고 해도 제대로 되지도 않을 것 같고 말이다. 그래도 번번히 내 아마추어적 위장술을 단번에 간파하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항상 기운을 차리고, 행복을 말하고,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하루 평균 2만보 이상씩 걸어다녔던 10일동안의 여행메이트와의 리프레시는 세비야에서 종료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행중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는 모든 사람들과의 여행을 끝내지 않을 셈이다. '여기에서 행복할 것'의 준말이 여행이라고 하니까.(모든 요일의 여행/김민철). 지금 여기서도 여느 여행처럼 같이 부지런히 걷고 느끼고 행복하자. 이 뭉클한 느낌이 우리 사이의 백만 스물 다섯개의 연결고리에 풀 멕이듯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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