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너를 생각하며 걷는다.
모든 더위를 스페인에 쏟아 부었다 생각했지만 매일이 너무 덥다. 꼭 더위 탓만은 아니겠다마는 (거의)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다. 여기저기 가보고 싶다가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다가도 금방 시들시들해져 버린다. 이렇게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을 때를 위해 진작 짱나이쓰한 취미를 만들던지 했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크다. 그 아쉬움에 또 깔짝깔짝거리지만 도무지 뭘 해야될지를 모르겠다.
그나마 취미같은 습관 중 하나는 라디오 다시 듣기. 주말에도 6시, 그러니까 새벽 06시에 눈이 떠진다. 출근해야되는데 늦은 줄 알고 화들짝 놀라 깬 이후로는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할 거 없이 딱 저 시간에 정신이 차려져 시작한 내 습관 중 하나다. 라디오 청취의 시작은 중학생때였다. 저녁에 실컷 졸았기 때문에 새벽에 공부는 해야겠는데, 무섭기도 하고 적적하기도 해서 작게 틀어 놓은 것이 라디오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만큼이나 환호하게 되고, 어린 마음에 맞아맞아 했던 것이 오프닝 멘트였다.
꽃도 표정도 마음도 피어난다는 표현을 쓰는데,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활짝 펴 보이는 것이 설레는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것에 완성이 되려면 표현을 해야한다.
(음악이 흐르는 책방, 박원입니다/7월)
예나 지금이나 오프닝멘트는 언제나 옳다. 결혼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드물 요즘이다. 언제나 펴 보이는 것에 인색한 나다. 그냥 좋다고 깡총거리다가 원펀치에 쓰리강냉이가 나가 정신 못차리고 헤롱거리는게 무서워 본능적으로 속을 여미게 됐다. 이러다가 결혼도 못하게 될까 두렵다. 바로 그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다시 와보고싶다고 생각한 곳이 생각치도 않게 마드리드였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많은 선택을 하게 되는데-해보지 않았지만 결혼준비도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첫 선택은 아무래도 나라, 도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단언컨데 마드리드는 이미 지워진 보기 중 하나였다. 지금와서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답체크였지. 미술관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고 게다가 친구도 살고 있는 이곳을 지우고 시작했다니. 아무튼 와타시 참 빠가야로데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여기 진짜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마치 파리에 루브르박물관 보다 오르세 미술관을 추천해주고 싶던 것처럼 너무나 추천해 주고 싶다. 심지어 아트샵까지 완벽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심지어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절대 트렁크에 안전하게 들어가지 않을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포스터를 2장이나 구매하고 말았다. (+ 내 방에 뙇 하고 붙이려고 했는데 스멜을 맡은 우리 엄마가 미리부터 절대 안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내가 출근한 사이 너 결혼하면 신혼집에나 붙이게끔 본인이 알아서 잘 고이 모셔뒀다며 찾지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 생각엔 엄마가 내 결혼까지 잘 감춰버린거 같다..이를 어쩌지)
양복에 빨간색 양말을 신고 다니는 감각있는 도시
아무 곳에 가도 사람들이 많아서 외롭지 않은 도시
광장이 매력적인 도시
비예보가 무색한 하늘을 보여줬던 반전매력의 도시
아직 못가본 대단한 미술관이 2개나 더 있는 도시
해질녘 가을 느낌이 나는, 가을이 기대되는 도시
당황스럽게 신혼여행이 생각나던 도시
바로 마드리드다.
너를 생각하며 걷는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너는 나에게로 온다. 이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향하고 있는것, 내가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 (너없이 걸었다, 허수경)
마드리드 솔sol광장의 0km. 9개의 도로가 시작된다는 이 표식을 밟으면 이 곳을 반드시 돌아온단다. 그래서 뒷사람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조금 오래 밟고 서 있었다. 생각해보면 혼자 뭐라고 중얼거렸던것 같기도 하다. 꼭 다시 돌아오자고. 아침에는 봄, 저녁에는 가을이었던 이 도시에 내 마음을 활짝 펴 보인 좋은 사람과 같이 정말 꼭 같이, 또 한 번 오자고. 이 날의 분위기를 함께 느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