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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03. 2021

강원도가 주는 힘

덜어내기

  <강원도의 힘>이란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오렌지색 철제 계단을 통해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 오래전 본거라 스토리가 연무에 휩싸인듯 가물거리기도 하지만, 강원도에 갈 때마다 그 장면이 연상되는 것을 보면 그게 바로 영화의 힘, 제목이 말해주듯 강원도의 힘이 아닌가 싶다.

 

  딱히 휴가지를 정하지 않은 해, 혹은 이미 다녀왔지만 아쉬움이 남을때 강원도로 향한다.

시원하게 탁 트인 동해 바다를 보고서야 그 해의 여름을 제대로 지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바다가 내어주는 풍경은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풍광들 역시 저마다의 변주를 담고 있다.

  강원도 홍천을 지나 속초에서 고성으로 향하는 산등성이마다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차 유리에도 송글송글 맺혀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우중충한 잿빛 구름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널을 뛰며 보였다 사라졌다 숨바꼭질을 한다. 짙은 블루 그레이 톤온톤으로 중첩된 먹구름이 산을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준다. 기가 센 구름을 머리에 인 산에는 영험한 기운마저 감돌 것 같다.

강력한 신비로움을 품은 산을 깍아 만든 터널을 50여개 지난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자연의 영험함만큼 위대한 인간의 능력치와 노고를 깨닫고는 숙연해지고는 한다.

유명 음식점 분점처럼 서면터널 7, 화촌터널8...시리즈로 죽 나열됨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인제에서 양양 구간은 터널만으로 족히 이동이 가능하겠다 싶다.

 마치 매직 도어를 통과하듯 신묘한 세계에 빨려들어갔다 내뱉어졌다 하는 찰나의 순간마다 계절이 바뀌듯 풍광이 변한다. 그렇 파란 하늘과 비, 작은 촌락과 신축 아파트촌을 마주한다. 양극단을 오가며 지루할 틈없이 펼쳐지는 창밖 풍경에 정신을 뺏기다 까무룩 졸다를 반복하는 사이 모퉁이를 돌아 드넓고 확 트인 세계, 바다를 만났다. 한 여름이 조금 지나 다시 만난 바다였다.


  여름이라 하기에는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가득찬 스산한 날이었다. 바람 소리가 귓가에 윙윙대었고, 파도는 성나고 거친 반항아처럼 모래 위로 스스로를 패대기치고 있었다. 하늘은 블루 그레이 단색으로 밀어버린듯 희끗한 공백없이 매트하게 무미건조했다. 그런 톤의 여름은 생경했고 그래서 또렷이 각인되었다.

마음에 품었던 여름 바다 목록에서는 살짝 빗겨났지만 그 나름의 미학을 지녔다. 아마 아이들의 머릿속에도 작열하는 태양빛, 인산인해를 이루는 바다가 아닌 고즈넉하고 을씨년스러운 송지호 해수욕장은 외전처럼 특별한 의미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런 날 바다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뜻하지 않은 사고와 지독한 감기를 수반할 것이 분명한데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달성을 위해 뛰어든다. 제지하지 못하고 반강제적으로 허하며 적어도 오늘 밤부터 간호에 매진하게 되겠다는 위험 감지 신호가 온다.

아이들은 악천후 속에서 촬영 매진하는 프로 배우처럼 온몸을 던져 바다와 지나가는 여름을 만끽한다. 부표처럼 파도 위를 두둥실 떠다니 본인들에게 허해진 짧은 시간을 누린다.

  대여섯개의 텐트와 채 20명 남짓의 인파로 비교적 한가한 오후를 보내던 수상 안전 요원들이 남자 셋의 등장으로 분주해지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분다. 그건 내가 몸을 녹고 바다를 관찰하던 은신처가 날라간다는 것, 허기를 달래줄 간식들이 바다 소금과 모래에 버무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스카우트에서 습득했어야 할 텐트 고정 기술에 무지한 남편에게 애꿏은 투덜거림을 던지며 분주히 은신처를 재정비하고 비상 식량을 비치타월로 꽁꽁 싸맨다.

  아이들은 바닷속에서도, 모래사장에서도 계획적이고 자기주도적으로 슬기롭게 시간을 보낸다. 맨손, 모래, 파도면 바다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놀이를 거뜬히 해나갈 수 있다. 노는데 그리 많은 도구가 필요한게 아니었다.

  맨발로 삼각주처럼 형성된 송지호 해수욕장의 해안선을 빙 둘러 걸어본다. 거친 동해의 너울성 파도와 잔잔한 강처럼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공존한다. 아늑한 물결 위로 초보 서퍼들이 강습을 받고 있다. 해안선의 끝에는 태안 신두리 해안 사구처럼 고즈넉하고 쓸쓸한 모래만이 남아있다.

  그렇게 이번 여행의 시발점이자 종착지를 느리고 천천히 둘러본다. 되도록 많은 영역을 두루 섭렵하던 기존의 유랑 여행과 달리 이번에는 행동 반경에 제한을 두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귀차니즘이 엄습한 아들1과 물놀이만 한다면 만사형통인 아들2의 취향을 최대한 고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본연의 바다'에 집중해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다.


  짐가방 한두개 정도로 가뿐히 떠나는 바다 기차 여행을 늘 꿈꾸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냄비에 후라이팬, 먹거리, 놀거리까지...이번에도 무게의 경량화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마음만은 가벼웠다. 늘 요일별, 시간별로 스케쥴링을 해서 먹을 것과 곳, 잘 곳, 할 것과 갈 곳을 정리하던 나는 이번에는 그런 '작전'을 짜지 않기로 했다. 작정하고 떠나는 여름휴가보다 힘을 빼고 생략해보기로 결단을 내렸다. 남들 기분에 맞춰 시기까지 통일했던 기존과 달리 한여름이 지나 만나는 바닷가도 나쁘지 않았다. 다른 색채와 질감을 가진 대자연을 마주한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모자란듯, 느린듯, 풀린듯 일상을 조여오던 속도와 에너지의 강박을 내려놓고 가장 느긋하게 여름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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