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없는 쾌락의 농촌체험

농사철 남자친구를 만나는 방법

군대를 전역한 전남친은 고향인 충북 진천군으로 올라갔다. '진천군'은 남자친구 덕분에 처음 알게 된 곳이었다. 남자친구의 아버님진천에서 벼농사와 함께 소를 키우셨다.


그 당시에 300마지기(약 6만 평) 넘게 농사를 지으셨다. 지금 우리는 100마지기 정도 농사를 짓는데, 300마지기라니. 이제 와서 상상해 보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농사는 혼자 하기 힘든 일이다. 농사일은 일손이 많을수록 좋다. 농사양이 많으니까 틈만 나면 자식들이 농사일에 동원됐다. 누나들은 분가라도 했지, 고향으로 돌아간 남자친구는 부모님과 한 집에 살며 직장생활과 함께 농사일을 도왔다. 그땐 몰랐다. 남자친구가 직장생활과 농사일까지 도우며, 부산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농사철엔 남자친구도 바빴다. 한가한 농번기에는 남자친구가 부산으로 왔고, 농사철엔 내가 진천으로 갔다.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장거리 연애였기에, 목마른 사람이 찾아갈 수밖에. 일찌감치 부모님께 서로를 소개하고, 건전하게 공개연애를 했던 터라 불편함은 없었다.


부산에서 대전까지 기차를 타고 약 2시간, 대전에서 진천까지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렸다. 장거리 출퇴근에 이골이 나서, 이 정도는 나들이 삼아 즐거운 마음으로 갔다.


남자친구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진천에 놀러 가면 집으로 갔다. 할머니까지 계신 대식구였고, 농사철엔 누나들과 친인척들까지 북적북적한 집이었다. 내향인인 나는 콩깍지 필터가 단단히 씌워져 있었다. 기가 쪽쪽 빨리는 상황임이 분명한데도, 남자친구를 만나서 좋았고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가 좋았다.


한창 모내기철인 토요일 아침, 온 식구가 논으로 출동한다. 작업복과 모자, 장화에 장갑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남편을 따라나선다. 오랜만에 자연 속으로 들어가니 재밌었다. 흙 밟고, 풀 냄새 맡고. 일하면서 중간중간에 먹는 막걸리와 새참은 또 왜 그렇게 맛있는지. 트럭 뒤 짐칸에 앉아서 시골길을 달리는 것도 재밌었다.


유튜브에서 '책임 없는 쾌락'이란 숏츠를 보았다. 책임질 필요 없이 그 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을 말한다. 조카바보인 삼촌이나 이모들이 대표적이다. 코카인 말고, 조카인. 조카의 귀여움과 꼬순내만 즐기고, 울거나 떼쓰면 부모에게 보내는 그런 상황. 내가 진천에서 농촌체험을 한 것도, 딱 책임 없는 쾌락과 같았다.


예능프로그램을 찍는 것 같은 기분. 신기한 게 천지고, 처음 경험하는 건 다 호기심을 자극하며 재밌었다.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면서, 논에 졸졸 따라다니며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수고했다'라고 칭찬받았다.


땀이나도 옷이 더러워져도 상관없었다. 땀이야 씻으면 그만이고, 옷은 벗어두면 그만이었다. 일하고 돌아가면 먹을게 차려져 있었고, 맛있게 먹었다. 밤늦게까지 술 한 잔 나누면서, 온 가족이 함께 웃고 떠들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게 진정한 농촌체험이지!'라고 착각했다.


나에게 농촌이란 외가댁과 동의어였다. 외가댁처럼 전남친의 집과 가족 들어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렇게 나는 농촌의 삶에 점점 스며들었다.




좋은 기분을 잘 감지해라. 그런 기분은 아주 드물게 오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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