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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 7년, 도전의 시작

벼농사로 돈벌면서 딴짓하는 업글인간

어렸을 적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집에서는 까불까불, 밖에선 입을 다물고 있는 성격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이 '넌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야. 소심해.'라고 말씀하셨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나는 내가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주변 친구들이 '넌 내성적인 성격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해도, '아니야! 나 내성적이야!'라고 말하고 다녔다. 


난 내향적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재밌지만 너무 오래 만나면 에너지가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지겨울 정도로 집에서 가만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더 심각했다. 5일을 출근하면 주말엔 에너지가 바닥났다. 회사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일을 하니 친구들 만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래서 주말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집콕하고 미드 몰아보기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때 '건어물녀'라는 별명이 생겼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독서를 시작하며 알게 되었다. 내성적인 것과 내향적인 건 다르다는 걸. 나는 내향적인 사람인건 맞지만 결코 내성적이기만 한건 아니었다. 최근에 MBTI를 검사했더니 내 결과는 ENFJ가 나왔다. 내가 I가 아니라 E라고? 의아했다. 나 스스로 '나는 내성적이야.'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고 살았는데. 그동안 내 안에 내향과 외향이 공존했을 텐데 나는 모르고 살았다. 결혼 후 엄마가 되었다. 나는 아가씨모드에서 아줌마모드가 되면서 봉인되어 있던 나의 E성향이 해제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딴짓을 시도할 용기가 생겼다.



맘친구 사귀기 실패후기

첫째를 임신하고 보건소 임산부교실에 매주 외출할 핑계가 생겼다. 낯선 지역에서 친구하나 없는 내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이란 공감대를 형성한 또래 엄마들을 만날 기회였다. 우리 지역에는 산업단지가 많아서 남편직장 때문에 타지에서 온 젊은 맘들이 많았다. 아는 사람도 없고 지역도 낯설어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임산부교실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면 서로 먼저 말 걸기가 쑥스러워서 눈치만 살피는 상황이 눈에 훤히 보였다. 누가 먼저 말 걸어주기만 기다리는 눈치게임. 내가 용기 있게 먼저 나서고 싶었지만 나도 아직 아가씨 모드였기에 옆자리 임산부에게 말 한 번 못 걸어보고 매주 매주 수업을 마쳤다.


첫째 출산 후 본격적으로 바깥활동을 시작했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보건소 오감발달수업과 도서관 뇌발달수업이었다. 매주 두 개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주변에 친구 할 엄마들만 살피고 다녔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육아의 고충을 나눌 동지가 필요했다. 친구가 없으니 대화상대는 남편뿐이라 여자들만의 수다가 간절하던 시기였다. 아이를 낳고 아줌마모드 초기버전이라 조금 용기가 생겼다. '이번주엔 꼭 친구를 만들어야지!'라고 맘먹고 옆자리 엄마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어디 사세요?' 하며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맘들 전화번호 따는 내가 참 신기하고 웃기고 슬펐다. 


그렇게 번호를 교환하고 '다음 주에 또 만나요~!' 하고 인사 나누는 맘친구가 드디어 생겼다. 매주 수업을 같이 들으며 수업 끝나고 커피 한잔, 밥 한 끼로 약속을 넓혀갔다. 그렇게 조금씩 친해지며 마음을 열 때쯤 나의 첫 번째 맘친구는 훌쩍 경기도로 이사를 가버렸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딴짓도전 : 맘들 모임 결성

본격적으로 맘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건 둘째를 임신하고 참여했던 임산부교실에서였다. 나는 2회 차 수업 때부터 주변에 인상 좋아 보이는 엄마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전화번호를 따고 다녔다.


출산의 경험은 정말 대단했다. 죽을 만큼 아픈 경험을 처음 겪어봤다. 그래서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다 벗고 간호사들과 의사 앞에 누워서 애도 낳았는데 쑥스러운 게 뭐야? 부끄러운 게 뭐야? 그렇게 아줌마는 무적이 되나 보다. 이때부터 나의 E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맘먹고 도전했더니 맘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1명이 어렵지 이후부터 친구 사귀기는 쉬웠다. 수업이 끝나면 밥을 먹고 차 한잔 마시며 일주일치 수다를 떨었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가 비슷하게 자라니 늘 이야깃거리가 넘쳤다.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기분이 좋았다. 육아의 고충을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힐링이 되었다. 


이때 결성된 맘들 모임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만나는 맘친구는 한 명뿐이다. 다른 맘들은 멀리 이사를 가거나, 직장생활로 만나기 어렵거나, 다른 친목모임으로 옮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래도 길에서 오며 가며 만나면 언제나 반갑다. 


지금까지 7년 동안 함께하는 맘친구는 서로 베프를 자청하며 꾸준히 일주일에 한 번 만나 밥 먹고 차 마시며 근황토크를 나눈다. 나보다 2살 많은 언니가 말하길, "지나 씨가 임산부 교실에서 처음 밥 같이 먹자고 했을 때 너무 좋았어!"라고. 처음 인사 나누고 임산부 셋이서 새로 오픈한 샤브샤브 뷔페에 런치 먹으러 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참 맛있었지. 비록 그 뷔페는 문을 닫았지만.



딴짓도전 : 캘리그라피

둘째를 임신하고 얻었던 자유시간 6개월 동안 참 바빴다. 맘친구 모임에서 수다도 떨고 밥도 먹고 차 마시는 것도 즐거웠지만 나는 좀 더 생산적인 딴짓이 하고 싶었다. 둘째 임신이라 첫째 때처럼 남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서관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첫째랑 도서관에 다닐 때 가장 듣고 싶었던 수업은 '캘리그라피' 수업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글씨를 그림처럼 써 내려가는 켈리그라피가 너무 궁금했다. 이때 시작한 캘리그라피는 둘째 출산 후에도 3학기 동안 연속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꽤 오랜 시간 배웠지만 연습량이 부족해서인지 실력이 늘진 않았다. 그럼에도 좋았다. 


캘리그라피로 쓸 좋은 문장을 찾느라 독서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하나 더 찾게 되어서 참 좋았다. 나의 삶에 저장해두고 싶은 문장을 캘리로 반복해서 적으며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캘리그라피를 연습할 때 혼자만의 시간을 집중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1줄의 짧은 문장이지만 하고 싶은 말을 문장으로 적는 연습도 할 수 있었다. 나의 글쓰기의 시작이 되었다.

    

캘리그라피 수업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도 사귀고 마음도 나눌 수 있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로 '좋아요'를 나누고 있다. 내가 만든 결과물을 인스타, 블로그에 공유하였다. 멋진 작품은 아지만 나는 만족스러웠다. 스스로가 참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덕분에 자신감도 생겼다. 



딴짓도전 : 수어교실

임산부 교실 때문에 매주 보건소를 방문할 때였다. 진천군보건소 맞은편에는 종합사회복지관이 있다. 저곳은 뭐 하는 곳일까 궁금해 로비를 구경하다가 우연히 사회복지관 내의 수화통역센터에서 '수어교실' 수강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았다.


수어가 낯설기도 했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수어는 하나의 외국어 같은 느낌이었다. 도전해보고 싶었다. 배워서 나쁠 것도 없고 손을 많이 사용하니 태교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수업을 냉큼 신청하고 매주 수업에 참여했다. 


수어교실 선생님은 진짜 농아인이었다. 내가 직접 소통하며 사회적인 관계를 맺어본 첫 번째 '장애인'이었다. 장애인을 만나본적이 없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장애인을 만나면 자리를 양보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자는 것이 전부였다. 아는 게 없으니 말도 행동도 다 조심스러웠다. 


몇 번의 수업 참여 후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랑 수어로 농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수어교실은 출산 직전까지 참여하며 수어로 간단한 자기소개, 인사하기, 안부 묻기 등이 가능해졌다.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수어교실에 다니며 수어를 배우고 써먹을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경험이었지만, 장애인을 막연히 불편해하는 인식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서 좋았다. 



딴짓도전 : 전래놀이

둘째 임신 중 참여했던 또 다른 도서관 프로그램은 '전래놀이 강사양성과정'이었다. 초등학생 때 학교운동장에 친구들과 놀던 놀이들을 생각하며 부담 없이 신청했다. 첫째 아이가 3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시기라 몸으로 많이 놀아줘야 했고 앞으로 둘째도 태어날 테니 미리미리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술래잡기부터 얼음땡도 배우고 잘 몰랐던 새로운 전래놀이들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수업은 수업인데 놀이수업이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2시간 동안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때 나는 배불뚝이 임산부였는데 수업에 참여하신 분들이 모두 맘들이라 배 뭉치지 않냐 걱정해 주시며 배려해주셔서 무거운 몸으로도 열심히 놀이에 참여했다. 진짜 스트레스가 팡팡 풀리고 동심이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놀이교육이 끝나면 마지막엔 조별 실습을 통해 전래놀이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아직 강사활동에 1도 관심이 없었던 나는 '잘 놀고 갑니다~!'였지만 그때 수업을 함께 들었던 많은 분들이 놀이강사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계신다. 꼭 놀이강사가 아니더라도 그때 함께 수업을 들었던 분들 중 다른 분야에서 활동가, 마을교사, 강사로 활동 중인 분들이 많았다. 


몇 년이 지나 그때 함께 했던 분들을 도서관이나 평생학습관, 학교 등에서 다시 만났을 때 느꼈다.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는 사람과 도전을 하는 사람의 차이. 처음엔 큰 차이가 없어 보이겠지만 그 작은 도전이 기회를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회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주도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딴짓도전 : 코바늘 뜨개질

도서관에 다니면서 매주 목요일 '뜨개질교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굉장히 생산적이고, 손을 쓰는 일이니까 태교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렸을 적 대바늘로 목도리를 떠본 경험은 있는데 서툴러서 금방 포기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때쯤 코바늘수세미 뜨기가 붐처럼 일어났다. 수세미는 누구나 쓰고 실생활에 필요한 제품이다.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하는 소모품이다. 수세미실 한 타래를 2500원쯤에 사면 수세미를 4~5개 정도 만들 수 있다. 출산, 육아로 비생상적인 삶이 우울했던 나에게 무척 생산적이게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6개월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이 자꾸 생산적, 실용적인 일에 집중하게 만든 것 같다. 돈은 벌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니 그 대신 쓸모 있는 일에 집착하게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뜨개질에 관심이 있었다. 가느다란 실이 얽히고설켜 넓적한 면이 되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 신기했다. 강사님은 수업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계셨고 뜨개질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질문하고 배우는 방식의 프로그램이었다. 코바늘을 처음 잡아보는 나는 코바늘 원리가 이해되지 않아 너무 어려웠다. 강사님께 배우고 싶었지만 강사님은 더 고난도 뜨개기술을 알려주시느라 바빴다. 대신 나는 강사님의 수제자(?)이신 할머니 수강생분께 가르침을 받았다. 수업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자 여기를 잡고, 이렇게 돌려서 이렇게, 자 이제 이걸 요렇게 하면 요렇게 돼요."


이렇게와 요렇게의 반복으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첫날 그냥 "예, 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말자 유튜브에서 '왕초보코바늘 뜨기' 동영상을 찾았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따라 하며 나 혼자서 호빵 수세미 뜨기에 성공했다. 그 뒤로 도서관 뜨개질 수업에는 가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어서 호빵 수세미 뜨기를 변형한 여러 가지 모양의 수세미 뜨기를 도전했다. 혼자서 수세미를 뜨면서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무척 뿌듯했다. 처음 수세미를 1개 완성하는데 1시간이 걸렸다. 처음 만든 수세미는 삐뚤빼뚤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수세미는 수세미다.' 못생겨도 거품내서 설거지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점이 참 맘에 들었다. 내가 돈 주고 사서 쓰던 수세미를 혼자 생산해 내다니! 내가 만든 수세미를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세미를 팔아서 돈 벌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말렸다. 


남편 : 너 수세미 한 개 뜨는데 몇 분 걸려?

나 : 처음엔 1시간 정도 걸렸는데 요즘 속도 붙어서 30~40분에 1개도 만들어!

남편 : 그래? 그럼 30분에 1개 만들 수 있다 치고, 수세미 1개 얼마에 팔 거야?

나 : 인터넷에 핸드메이드 수세미 3천 원에도 팔던데, 다이소에 파는 수세미 가격을 생각하면 2천 원 정도?

남편 : 그럼 2천 원을 받는다 치자. 1시간에 4천 원 버는 거니까, 니 시급이 4천 원인 거네?

나 :... 


시급으로 생각을 못 해봤다. 열심히 만들었으니 팔면 돈이 되어 돌아올 생각만 했다.  재료비만 생각하고 이득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시간을 4천 원밖에 벌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허무했다. 그 뒤로 수세미를 만들어 팔 생각은 접었다. 대신 틈날 때마다 만들어 주변 지인들에게 부담 없는 선물로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주부들이 좋아하는 유익한 선물이다.    


딴짓도전 : 뜨개질 모임

둘째 임신 때부터 시작한 수세미 뜨기는 둘째 출산 후에도 계속되었다. 코바늘 수세미 뜨기에 자신감이 붙고 나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그맘때 읽었던 책에서 이런 문장이 와닿았다. 무슨 책인지 기억이 안 난다. "머릿속 지식도 써먹지 않으면 썩는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배운 코바늘 뜨기를 꼭 써먹고 싶었다. 유튜브로 혼자 배울 수도 있지만 직접 보고 배웠다면 더 쉬웠을 것 같다. 난 쉽게 잘 가르쳐줄 자신도 있었다. 겸사겸사 취미생활을 함께할 친구도 만들고 싶었다.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맘카페에 글을 썼다. 아직 둘째가 어려서 아기띠로 안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용기를 냈다. 아줌마모드가 작동한 것이다.


"수세미 뜨기 배우고 싶으신 분이나, 이미 뜨고 계신 분도 좋아요~ OO카페에서 매주 금요일 2~4시에 모여서 수세미 뜨기 함께해요!!


아무도 반응 없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몇 명의 연락이 왔다. 우린 카페에서 처음 만났지만 '수세미'라는 공통주제가 있어서 어색하지 않았다. 수세미를 뜨면서 근황토크도 할 수 있었다. 대부분 이주민들이었고 친구가 없어 심심한 찰나에 내 글을 봤다고 했다. 보람찼다. 나의 쓸모가 또 늘어났다. 즐거웠다. 


처음 2~3명이 모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한 명씩 더 참가하면서 최대 6명까지 모였다. 나이대도 천차만별. 생산적인 모임이 만들어졌다. 우린 매주 모여 각자 준비한 재료로 각자의 뜨개질을 한다. 손은 움직이며 입은 말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은 이야기, 시댁 이야기, 남편 이야기, 친정 이야기 등등. 함께 모여서 수다도 떨고 수세미 생산도 하고 참 유익하고 즐거웠다. 부담 없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진천에 오고 처음 느끼는 소속감이었다. 


내가 만든 수세미는 생각보다 꽤 훌륭(?)해서 가끔 벼룩시장이 열리면 직접 팔기도 했다. 물론 수세미가 많이 잘 팔리진 않았다. 몇 번 팔아보고 느낀 점이 있다. 수세미를 팔아서 돈은 안된다. 팔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그냥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는 게 더 좋겠다. 그래도 덕분에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 지식을 나눠주고 가르치는 즐거움. 그리고 나는 꽤나 리더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딴짓도전 : 주민자치위원회

시골마을에 젊은 사람 구경하기가 참 힘들다. 내가 결혼하고 어머님을 따라 자주 다니면서 주변 이모님(?)들이 참 기특해하셨다. 시골에 젊은 사람이 왔다며. 그리고 이것저것 참여를 독려하셨다. 그때 살짝 반강제로 참여했던 일이 바로 우리 면의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 키우는 젊은 새댁이 쉽게 할 만한 활동은 아니었다. 봉사활동도 해야 했고 행사가 있으면 찬조금도 내야 했다. 면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의에 참석해서 '네 동의합니다' 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우리 면에서 각 분야에 활동하는 대표분들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고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동네가 작다 보니 내가 누구의 며느리이고, 남편이 누구인지 금방 소문이 났다.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면사무소에 신청서를 제출하거나 문의할 일이 많은데, 주민자치위원회를 하는 동안 면에 찾아가면 알아봐 주시고 인사도 나누고 궁금한 게 있으면 맘 편하게 질문하고 도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역에서 입지를 다지려면 이런 활동도 큰 도움이 되겠다. 


임산부일 때 시작해서 둘째 낳고 아기띠로 안고 다니며 만 2년 동안 주민자치위원회로 활동했다. 아기 안고 열심히 활동한다고 연말에 표창상도 받았다. 쑥스러웠지만 보람은 있었다. 그리고 농촌사회에서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정보력인지 깨닫는 기회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둘째를 임신한 6개월 동안 참 많은 활동을 했다. 글로 정리하면서도 어이가 없다. '진짜 이걸 다 했다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몇 가지 생략하고 안 쓴 것도 있다. 아낌없이 시간을 쓰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활발하게 배우고, 사람들 만나니 확실히 첫째 때보다 우울감, 짜증, 스트레스가 적었다. 육아도 덜 힘들게 느껴졌다. 인생이 잘 풀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6개월의 간절한 경험이 있었기에 5년 만에 자유시간이 생겼을 때 망설이지 않고 도전을 시작했다. 그냥 아줌마의 일상이 바뀐 게 뭐가 대단하냐 싶겠지만, 나 하나의 인생이 달라지니 내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긍정의 에너지가 널리 퍼졌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딴짓에 도전했고 작지만 많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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