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모래내시장
인천에는 전통시장 테마여행을 해도 될 만한 개성 있고 정감이 느껴지는 이름의 시장이 많다. 무려 50여개의 시장이 있는데 곡물만 취급하는 수인곡물시장, 토지금고시장, 부평 깡시장, 장승백이 시장, 석바위 시장, 옛날에 거북이가 많이 살았었는지 거북시장도 있다. 남동구 구월동에는 모래가 많은 맑은 냇가를 뜻하는 ‘모래내’라는 정겨운 이름을 가진 시장이 있다. 모래내는 도심개발로 복개(하천이 흐르는 위를 콘크리트로 덮는 것)가 되면서 지금은 그 모습을 감춘 채 도로 밑으로 흐르고 있다.
1985년에 생겨난 모래내 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나이가 젊고 통이 큰 시장이다. 전통시장에는 대부분 나이 지긋한 분들이 일하고 계시는데 모래내 시장엔 젊은 상인들이 많다. 시장을 지나다보니 내가 본 장터 가운데 시장통이 가장 크고 넓었다.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의 시장통이 쭉쭉 뻗어있다. 장보는 손님들이 많아도 자전거나 크고 작은 카트로 쇼핑을 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덕택에 여유롭게 거닐기 좋고 볼거리가 많은 재미난 시장이다. 구경하는 재미, 고르는 재미, 먹는 재미를 선사해 어느 시장보다 오래 머물게 된다.
200여개의 점포, 600명이 넘는 상인들이 일하고 있는데 동생뻘인 구월시장까지 곁에 이어져 있어 인천 최대의 시장으로 손꼽힐만하다. 소상공인진흥공단의 사업인 문화관광형시장에 3번이나 선정되어 시장 마케팅, 상인교육, 시설보완, 고객센터운영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여러 버스 노선과 2호선 전철 모래내시장역이 가까워 찾아가기도 편하다. 시장 SNS(facebook.com/moraenaemarket)를 통해 이벤트나 가게정보, 맛집 등을 알 수 있어 장보기 전에 들르면 더욱 좋겠다.
없는 게 없는 만물시장
모래내 시장에 들어서면 머리위로 멋지게 펼쳐진 삼각형 모양의 천들이 손님을 맞이한다. 하늘 위에 줄지어 떠있는 큰 연이나 범선의 돛 같아 이채롭다. 여름철엔 높이를 낮춰서 햇볕을 가리는 차양막 역할을 한단다. 평일엔 자동차도 지나갈 수 있는 400m의 대로를 중심으로 양편에 상점들이 빼곡하다.
농산물 점포로 시작한 모래내 시장은 현재는 의류 가구 그릇 침구류 보석 각종 공산품은 물론 축·수산물 식료품 청과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없는 게 없는 만물시장을 보는듯했다. '모래내 시장에서는 사지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은 단순한 찬사가 아니었다. 물건이 많으니 볼거리도 많아 한 눈 파는 일마저 즐겁다. 아파트 단지와 백화점, 학교가 자리한 도심 속에 이런 큰 시장이 자리하고 있다니 놀랐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오일장인 순천의 아랫장, 동해시의 북평장을 떠오르게 하는 풍성한 장터다. 시장 안에 상인들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할인마트와 다이소가 들어서 있다. 시장에 피해가 안 가는 건 물론 상생의 뜻으로 입점하게 됐다니 새삼 모래내 시장의 저력을 느끼게 된다.
"귤 한 박스 만원 ~ 덤도 많이 드립니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파는 ‘오빠네’, ‘총각네’ 야채 가게 젊은 상인들이 외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시장통에 울려 퍼진다. 시장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이 추운 겨울에도 사람들의 얼굴에 표정과 온기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장에서 젊은 상인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희망이 엿보인다.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래내 시장은 구월동 농산물 도매시장과 가까워 싱싱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생선과 해산물을 파는 가게가 제일 북적였다. 연안부두와 소래포구에서 온 수산물로 풍성하다. 바다의 물결이 껍질에 그대로 새겨진 가리비 조개, 짙은 갈색을 내는 싱싱한 오징어, 바닷가 돌 위에 하얗게 붙어 피어나 ‘석화’라 이름 붙은 굴이 야물게 모여 있다. 굴은 어른이 되서야 그 맛을 알게 되는 해산물이다.
굴 하나를 시식한 아이에게 맛있냐고 물어보니 아무 맛도 안 난다며 얼굴을 찡그린다. 이맘때 많이 볼 수 있는 성인 남자 허벅지만한 방어가 한 마리 만원에 손질까지 해준다. 기름기가 많은 방어는 매운탕으로 먹지 않고 고등어처럼 김치찜으로 먹는 게 제 맛이다.
큼직한 동태는 3마리에 만원. 내 소울 푸드(Soul Food) 동태찌개가 생각나 카메라를 들이대자, 동태만 찍지 말고 나도 예쁘게 찍어달라며 웃는 상인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난다. 시장 풍경을 카메라에 담다 보면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상인들도 있는데 이곳은 사진촬영에 다들 거부감이 없다. “잘 찍어 예쁘게 (SNS에) 올려 주세요~” 오히려 북돋는 상인들도 있다. 젊은 시장의 특징이다.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모래내 시장
모래내 시장은 식당보다는 반찬가게, 탕국가게, 젓갈·나물·김치 전문점 등이 훨씬 많은 곳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모래내 시장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반찬’이 상위에 나올 정도. 외식을 꺼리게 되는 코로나 시대에 잘 맞는 시장이다. 반찬가게 중에는 건강에 좋은 반찬을 직접 만들어 지식경제부장관상을 받았다는 점포도 있다.
어느 가게나 매일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흔히 제대로 대접받음을 상징하는 '9첩 반상'이니 하는 말은 여기서는 기도 못 펼 듯하다. 엄마의 손맛이 그리울 때, 집밥다운 밥이 먹고 싶을 때 절로 들를듯하다.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전집에서 모듬전을 한 봉지 샀다가 전부치기 비법을 전수받기도 했다. 뒤집개를 하나씩 양손에 들고 사용하면 훨씬 뒤집기가 수월해 기름이 안 튀고 전의 모양도 망치지 않는단다. 단백질이 풍부하며 고소하고 쫄깃한 소라장과 특유의 냄새 때문에 홍어를 못 먹는 사람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홍어무침,
5천원에 3가지를 맛 볼 수 있는 다양한 젓갈 등 별미 반찬들도 많다. 익숙한 배추김치는 물론 무와 얼갈이 오이 갓 고들빼기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손맛을 자랑한다. 이 맛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모래내 시장을 대표하며 멀리서도 손님이 찾아오는 스타 맛집도 빼놓을 수 없다. 무려 50년이 넘은 업력의 민달이네 국수집과 냉면에 숯불고기를 함께 먹는 고쌈냉면집이다. 칭따오 중화반점에서는 5천원에 짬뽕을 먹을 수 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은 적어도 모래내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모두 시장 상인들의 인정과 보증을 받아 오래 버틴 맛집들이다.
국수집 주인장은 옛날국수, 오색국수 등을 생산하는 국수공장을 운영한다. 저렴하고 맛있는 우리집 국수가 제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국수를 뽑는단다. 자부심은 끝까지 지켜야할 마지막 재산이다. 꼬들꼬들한 면이 감칠맛 나는 칼국수가 4천원이다. 지금 떠올리기만 해도 혀가 안달복달한다. 칼국수 국물은 날이 추울수록 깊은 맛이 난다. 호호 불며 떠먹다보면 배꼽 언저리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