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하천을 품고 자리한 전국의 여러 도시 가운데 가장 친수적인 도시는 수원이 아닐까싶다. 물 수(水)자와 근원 원(原)자를 쓰는 수원이라는 도시 이름부터 남다르다. ‘물고을’이라는 친근한 우리말로 부를만하다. 드넓은 평야를 품은 광교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산줄기에서 시작되는 4개의 물길(서호천, 황구지천, 수원천, 원천리천)을 천혜의 지리에 부합하도록 해주었다. 수원시에서 조성한 길 가운데 모수길이 있는데, 이는 물길의 근원이라 하여 백제 시대 '모수국'이라 불렸던 수원의 옛 이름에서 따온 길이다. 아주 오래 전 삼한시대에 수원 일대에는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하나인 모수국이 있었다고 한다.
모수국 수원은 도시의 여러 산 덕분에 생겨난 이름이지 싶다. 해발 582미터인 광교산 남쪽 아래에 자리한 수원시는 북쪽으로 백운산 형제봉 등에 둘러싸여 있으며, 시내 중앙부에는 팔달산·여기산·숙지산 등이 솟아 있고 이곳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수원 곳곳을 적시며 흐르고 있다. 수원의 여러 하천 가운데 서호천과 황구지천, 원천리천, 수원천 등은 물길이 이어져 있어 하천여행하기 좋다. 개인의 삶이 각자에게 유구한 역사이듯, 작은 하천이지만 저마다의 이야기와 역사를 품고 있어 흥미롭다. 수원천 상류에는 수원 시민들의 안식처이자 식수원인 광교저수지가 기다리고 있어 더욱 풍성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서호천(西湖川)이 가까이에 흐르는 수도권 전철 1호선 화서역에 내려 하천여행을 시작했다. 아파트와 가게들이 도열한 둑 위로 천변길이 나있고, 하천 바로 옆으로도 산책할 수 있는 동네 하천이다. 동네라는 부를수록 발음할수록 정겨운 기분이 드는 단어와 어울리는 서호천에는 오리들이 유영하고 징검다리 사이로 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안온하고 다정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느릿느릿 흘러가는 저 물길처럼 삶 자체를 바라보고 싶다, 어떤 부담도 무게도 없이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하천이다. 하천에 놀러온 왜가리가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날아다니는 모습에 절로 눈길이 머문다. 반려견, 반려식물처럼 반려천이라 할만하다. 봄날 천변에 가장 먼저 피어나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향긋한 쑥이다.
따스한 봄볕과 봄비를 맞으면서 이름처럼 쑥쑥 자란다. 주민 할머니는 전쟁으로 훼손된 땅에서도 가장 먼저 나는 게 쑥이라고 말해주었다. 머리에 댕기를 한 귀여운 쇠백로들이 물속에 발을 담근 채 물고기 사냥에 여념이 없다. 쇠백로, 쇠오리, 쇠물닭처럼 이름 앞에 ‘쇠’자를 붙이는 이유를 얼마 전 알게 됐다. 같은 종이라도 몸집이 작은 조류에게 붙여준 작을 소(小)자가 쇠로 변했다고 한다.
산악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은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덕택에 도시마다 물줄기가 흘러내려 주민들에게 힐링과 안정감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동네 인근에 달리거나 산책하기 좋은 하천길이 있다는 것은 ‘코로나 블루’를 이겨내는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스트레스가 쌓였던 시민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하천이다. 걷기를 즐기는 사람, 걷는 것은 답답해서 뛰는 사람, 날렵한 모습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 등 저마다의 모습으로 하천을 즐기고 있다. 어느 여성 라이더들이 자전거를 타다말고 천변에 자전거를 뉘여 놓은 채 봄 나물을 캐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서호천이 잠시 쉬어가는 서호저수지 직전에 재미있는 이름의 여기산(104m, 권선구 서둔동)이 솟아있다. 산은 구릉처럼 야트막하지만 나무들이 울창하다. 소나무 군락 위에 백로, 왜가리 등의 새들이 앉아 있는데 좀처럼 보기 드문 백로 서식지로 안내판이 서 있다. 천변에서만 보았던 하얀 백로들이 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틀고 새끼들과 앉아있는 모습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그 옆에는 가마우지 서식지도 있다. 흰 백로와 검은 가마우지가 공존하는 곳이다. 왜가리, 황로, 해오라기 등도 살고 있다. 이곳 백로 서식지는 수원시에서 2008년 12월 9일부터 ‘여기산 야생동식물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사람들이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도심지 가까운 곳에 백로 서식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서호저수지와 서호천에서 활발한 먹이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천과 만나 힘을 키운 서호천은 서호저수지(팔달구 화서동)에 이른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인공호수를 만들었는데 화성의 서쪽에 있는 저수지가 바로 ‘서호(西湖)’다. 서호천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너른 저수지다. 서호가 생겨날 때의 본래 이름은 축만제(祝萬堤)로 ‘천 년 만 년 만석(쌀 일만 섬)의 생산을 축원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농업생산의 중요한 시설이었다.
정조 임금이 수원화성을 쌓을 때 내탕금(왕실 자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했으며 당시 만든 표석이 호숫가에 서있다. 1만 냥은 약 2억~3억 정도 되는 큰 액수다. 축만제 조성은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799년에 펼친 사업으로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여러 개의 저수지를 조성했다. 그 가운데 축만제가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다. 축만제 주변에는 국영농장인 서둔이 있었으며, 현재도 서둔동이라는 지명과 농토가 남아있다. 축만제는 수원화성 군사들의 식량생산은 물론 백성들의 식량자급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농업생산시설이었다.
저수지 제방길을 산책하는 시민들과 논병아리. 쇠백로, 물닭, 흰뺨검둥오리 등이 어울려 평화롭기만 하다.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물 위를 힘차게 달리는 논병아리, 물닭의 몸짓에 사람들의 감탄이 박수처럼 터져 나온다. 이곳은 다양한 철새들이 찾는 철새도래지이기도 하다. 물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먹잇감을 얻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고 저수지 상류 쪽에서 흘러오는 물의 온도가 13도 정도로 따뜻하기 때문에 저수지의 대부분이 얼지 않는다. 덕택에 많은 무리의 철새들이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쉬다가 얘기를 나누게 된 동네 어르신은 여름날이면 어릴 적 친구들과 서호에 들어가 바닥까지 잠수해 손바닥만 한 말조개를 한 아름 잡아들고 신나게 집으로 오곤 했단다. 조갯살이 말고기처럼 질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축만제 제방길 옆에는 너른 논밭이 펼쳐져 있다. 옛날엔 국영농장인 서둔이었으며 지금은 농업진흥청에서 운영하는 국립식량과학원의 연구재배단지다. 도심 속에서 농촌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서호천변에 농촌진흥청 외에 서울대 농대도 있었던 것을 보면, 수원은 우리나라 농업연구의 중심이었던 것 같다.
축만제의 가치는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2016년 11월 ICID(국제관개배수위원회) ‘세계관개 시설물유산’으로 등재된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ICID가 축만제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가뭄에 대한 구휼 대책과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과 재원을 제공하는 등 백성의 식량 생산과 생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저수지 중앙에 떠있는 작은 섬은 철새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위해 만든 인공 섬이다. 그런데 다른 새들은 거의 없고 까만 가마우지들이 점령하다시피 모여살고 있다. 백로, 왜가리, 까치 등의 새는 섬을 떠났다. 떼를 지어 사는데다 잠수를 해서 물고기를 잡는 노련한 사냥꾼 가마우지를 능가할 새는 없는 듯하다. 가마우지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배설물이 쌓이면서 아까시나무와 버드나무가 하얗게 변하고 있다. 인공 섬의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인간의 손이 닿아야 하는지, 자연 스스로의 치유능력에 맡겨야 하는지 여행자의 눈에도 진퇴양난이다.
수원천은 수원 북쪽 끝 광교산에서 발원해 광교저수지를 지나 수원시의 도심을 가로지른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데 북쪽의 북수문(화홍문)에서부터 남쪽 남수문까지 물길이 잘 이어져 있다. 수원화성은 수원천의 자연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수원천과 어우러진 멋진 역사 유적들이 있다. 수원 8경 중 하나인 화홍관창은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이름 붙은 화홍문 아래로 흐르는 수원천 물줄기로 만들어지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원천에서 만나는 역사유적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곳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북수문(화홍문) 동쪽 언덕에 자리 잡은 동북각루(방화수류정)에 올라가면 탁 트인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전국의 하천변 정자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베스트 5중 하나다. 길고 독특한 이름, 건축 구조와 바닥 모양을 종잡을 수 없는 자유로움, 전투시설인 성곽의 망루를 풍류정신 가득한 정자로 구현한 역설, 용연을 내려다보며 성곽 위에 우뚝한 웅자까지 방화수류정은 조선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문화유산 중 하나인 정자의 최종판이다.
수원화성은 유려하고 멋스러워 한국 성곽의 꽃이자 정점으로 평가되며 사진가들 사이에도 인기 있는 곳이다. <정조실록> 나오는 내용을 보면 이해가 된다. 수원 화성을 설계하던 정약용이 정조 임금에게 이렇게 묻는다. "성이란 튼튼하고 적을 물리칠 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 이렇게 아름다움에 심려를 두십니까." 정조는 답했다. "어리석다, 아름다운 것이 바로 힘이니라."
이어서 주민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시장이 생기고 농업생산량 증가를 위해 여러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장용영이라는 군대가 배치되었다. 이와 같이 정조는 수원을 자급자족의 신도시이자 한양도성에 버금가는 별경(別京)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800년 세상을 떠나면서 의도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천변 양쪽에는 지동시장, 못골시장, 미나리광시장 등 9개의 전통시장이 있다. 한 동네에 이렇게 많고 다채로운 장터가 들어서 있는 도시는 전국에서 수원이 유일하지 싶다. 주말과 휴일이면 천변 주변시장은 왕성하게 가지를 뻗은 식물처럼 불어나 있다. 사람들로 복닥거리고 각종 음식냄새가 어우러지기 시작하면 오래된 시장들이 저마다 커다란 생명체로 변해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듯하다.
한때 시장 곁을 흐르는 수원천을 복개(하천이 흐르는 위를 콘크리트로 덮는 것)한 후 주차장을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자동차는 늘고, 땅이 부족하니 생각한 궁여지책이었다. 요즘은 주차장을 걷어내는 게 유행이다. 자동차는 여전히 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무려 300살이 넘었다는 고목 느티나무가 사는 광교공원에 닿으면 수원천의 발원지 광교저수지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수원의 진산(鎭山)인 광교산(582m)의 물이 모여드는 광교저수지는 규모나 역할에서 물고을 수원을 대표하는 호수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10월에 공사를 시작해 1940년 12월 완성되었다고 한다.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천이 흐르고 뽕나무 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소 저수지에 흔히 있는 각종 식음료점, 화려한 조경시설, 높은 전망대 등이 없어 청정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알고 보니 수원시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비상시 식수원으로 활용하는 중요한 호수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는 말씀이 떠오르는 곳이다. 저수지 위로 낮게 날아다니는 중대백로와 왜가리들의 몸짓이 우아하고 돋보인다. 옆 동네 영통구에는 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가 이웃하고 있어 모수국이라는 옛 지명 값을 하고 있다.
철마다 자연미가 아름다운 광교산과 광교저수지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사시사철 절경이다. 특히 온갖 꽃이 만개하는 봄날, 광교저수지 산책길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꽃길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약 3.5km 길이의 광교저수지 둘레길은 절반이 수변 데크길이고, 나머지 절반은 광교산 자락의 숲길로 완만한 산책과 적당한 운동을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힐링 트레일이다. 저수지 수변 산책로인 광교 마루길을 걷다보면 봄날의 시정(詩情)이 저수지 전체에 흥건하게 느껴진다. 저수지의 고요함을 가르는 새들의 맑고 경쾌한 지저귐에 시선이 절로 뺏긴다.
광교산 자락길에서 만나는 삼림욕장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도심에서 느껴보지 못하는 피톤치드의 위력에 기분 좋은 현기증이 인다. 450ha의 자연 삼림에 산책 코스를 정비하고 각종 운동 기구를 설치해 등산과 휴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건강공원이다. 상쾌한 숲길을 걸으며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어 시민들에게 기분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천혜의 광교산 경치와 도보 3분 이내에 광교 저수지를 둘러 볼 수 있는 수변 산책로가 이어져 있다. 산 좋아하는 어진 이(仁者樂山)나 물 좋아하는 지혜로운(智者樂水) 사람들이 찾기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