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자전거여행
부여는 찬란한 백제의 혼이 담긴 고도로서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하다. 군 전체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화유산이 많아 총 245개에 이른다. 이중 국가지정문화재만 무려 52개(국보 4개, 보물18개, 사적21개, 천연기념물2개, 민속자료 5개)나 된다. 금강 제일의 고도(古都)라 할만하다. 금강 물줄기는 부여 땅에 이르면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불린다. '백제의 큰 강'이란 뜻을 담고 있는 백마강은 삼국사기 등 백제 멸망 이전에 쓰인 기록에 이미 ‘백강(白江)’이라는 이름이 표기되었다. 663년 8월 백제 부흥군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운명을 건 전투를 벌였던 백강 전투에 나오는 바로 그 강이다.
백제-왜(일본)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되어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으로, 당시 일본은 백제의 수교국으로서 수만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긴 후 혼란에 빠진 백제를 안정시킨 왕이자, 공주 최고의 역사유적 무령왕릉으로도 유명한 백제 25대 무령왕은 일본 규슈 사가현에서 출생했다. 당시 백제는 강국이었다. 도성 안에 호수처럼 넓은 인공 연못을 파고 뱃놀이를 즐길 만큼 여유가 넘쳤다. 신라, 고구려보다 경제력이 강했으며 인구도 많았다. 가까운 왜(倭)와 중국은 물론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세력권을 형성했다. 하지만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사직이 무너졌다. 백제 패망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 때문일까, 백마강에는 유독 고즈넉한 운치가 가득하다.
백마강에 있는 3개의 선착장(구드래, 고란사, 수북정)에서 유람선이나 고증을 거쳐 건조한 황포돛배를 타고 수상관광의 멋과 흥을 누려볼 수 있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다. 황포돛배에서 손에 닿을 듯 보이는 백마강 유역 부소산의 명소 낙화암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삼천궁녀의 애달픈 이야기로 인해 명승지로 인기를 얻고 있는 곳이다.
고려 후기에 간행된 삼국유사에는 낙화암의 전설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과 접해 있다. 전하기를 의자왕이 모든 후궁들과 함께 서로 이끌고 와 강에 투신해 죽었다. 이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틀어 낙화암이나 삼천궁녀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삼천'은 단지 '많다'는 의미로 조선 중기 한 문인이 쓴 문학적 표현이고 '낙화암'도 우암 송시열이 후대에 당시 일화를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수사에 불과하다. 결정적으로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패망 후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간 후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백제가 항복한 660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한 사찰 고란사는 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풍광 좋은 절이다. 고란사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지었다고 한다. 산 암벽에 자라는 고란초라는 귀한 풀에서 사찰이름이 유래했다니 흥미롭다.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 고란초를 보기 힘들다. 천연기념물과 동급의 귀한 식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고란사는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가 유명하다. 한번 마시면 3년은 젊어진다고 하니 방문객마다 꼭 마시는 물이다. 나는 약수보다 예불시간 고란사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가 더 좋았다. 사찰에 있는 큰 종을 이르는 범종을 영종(靈鐘)이라 하더니 정말 영혼을 위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백제는 사라졌지만 백제의 절 고란사 종소리는 오늘도 울린다.
부여에도 금강을 바라보며 산책하기 좋은 수변공원이 많다. 칠지공원, 백마강 생활체육공원, 정림공원, 구드래 조각공원, 나래공원 등이 있다. 백마강 레저파크가 가장 인기 있는 공원으로 오토캠핑, 카라반, 워터파크, 바나나보트 등 수상 놀이기구, ATV 등 다양한 레저 활동을 즐길 수 있다. 국내 최초로 수상과 육상을 넘나드는 수륙양용버스는 관광용 시티투어버스로 꼭 타봐야 한다. 강에 입수한 버스는 배로 변신해 백마강 물살을 헤치며 유람선처럼 강 위를 달린다. 천정대 낙화암 궁남지 정림사지 부소산성 등 부여를 대표하는 관광지에 들른다. 특히 버스를 타고 금강 위를 달리는 기분은 특별한 추억이 될 것 같다. 관광지를 지날 때 마다 해설사의 설명까지 곁들어진다.
나래공원은 금강을 따라 난 가장 공원으로 대규모 억새군락으로 유명한 곳이다. 본래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평야였는데 공원으로 조성했다. 가을에 보면 정말 장관이겠다. 주로 산지에서 흔히 만나는 억새풀을 강변에서 보니 이채롭다. 물가에 사는 물억새로 억새에 비해 색이 흰 편이다. 자전거를 타고 억새 풍경을 감상하며 한참을 달려도 될 만큼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공원이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가를 보내는 주말의 강변공원이야말로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는 듯 보였다.
치렁치렁한 가지가 그늘을 드리워주는 버드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계절을 느끼는 시민들, 배드민턴을 치는 가족들 모습이 정답다. 가까이에 멀끔한 카페들이 많지만 이렇게 자연미 가득한 공원이 좋아 발길이 머물게 된다. 구드래 조각공원은 옛 백제인의 조각 기술을 이어받은 지역 출신 유명 조각가 작품과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백제의 문화를 상징하는 옛 정취와 함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이 공원은 휴식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의 진산 부소산(96.4m)은 '부소'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를 뜻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아름답고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름났다. 오늘날에도 산림청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될 만큼 경관이 남다르다. '껍데기는 가라'를 지은 향토 시인 신동엽이 부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고 칭찬한 곳이다. 지세가 완만하고 야트막해 오히려 구릉에 가깝다. 해질 무렵 부소산에 내리는 저녁 비, 낙화암의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애달픈 소쩍새의 울음,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푸른 백마강에 잠긴 달빛은 부여 사람들만 아는 색다른 부소산의 비경이라고 한다.
부소산성 아래엔 정겨운 이름의 나루터 구드래 선착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관광용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유람할 수 있다. 백제시대로 돌아간 듯 이채로운 기분이 드는 황포돛배에 올라타면 백마강에 대한 안내방송과 함께 노래가 흘러나온다.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아도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로 시작되는 가수 배호의 ‘추억의 백마강’ 노랫말이 각별해진다.
구드래 나루터는 과거 사비성의 관문 역할을 한 곳으로 백제의 대표 무역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마강과 부소산이 서로 어우러진 풍경이 빼어나 예부터 많은 이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구드래’의 어원을 설명한 안내판에는 삼국시대의 흥미로운 고대어가 나온다. ‘큰 나라’의 순우리말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크다(大)는 뜻의 ‘구’와 백제의 왕족을 이르던 ‘어라하’라는 말이 합해졌다는 설이 있다. 그 가운데 당시 수교국인 왜(일본)에서 백제를 부르던 ‘구다라’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그럴 듯 했다.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 쪽에서 금강 상류 강 건너를 바라보면 야트막한 산자락에 바위가 희게 드러난 자리가 있는데, 그 바위가 바로 천정대다. 백제 때에 재상을 선출하던 곳으로 무려 삼국유사에 나오는 바위다. “나라에서 재상감을 의논할 때 후보자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 속에 넣고 봉해서 천정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뒤 상자를 가져다 열어보고 그 이름 위에 인(印)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이 재상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하늘이 국무총리를 점지해준 셈이다. 하늘을 받들고 섬기던 부족사회로의 풍습이 백제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재상임명 등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이곳은 부여 8경 중 하나로, 아래로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에는 부소산과 나성이 보인다. 백마강의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 비로 물이 많이 찰 때는 마치 강물에 뜬 섬과 같다 하여 '뜬섬'이라 불리는 부산(107m)이 지척에 보인다. 산 정상에 부여의 배후 성곽이었던 부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산자락에 옛 서원과 고찰 청룡사가 자리하고 있다. 부산은 한자 이름도 뜰 부(浮)자를 쓴다. 청주에서 홍수로 떠내려 온 산이라는 특이한 전설을 가진 곳으로, 전국의 산 이름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호기심을 부르는 산 이름이지 싶다.
부여읍을 끼고 있는 백마강의 상류에 천정대가 있다면, 하류에는 ‘자온대(自溫臺)’가 있다. 자온대는 부여읍의 중심으로 건너가는 백제대교 옆 강물 위로 솟은 20m 높이의 바위다. 절벽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바위의 이름이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자온대의 이름도 삼국유사에 나온다. 백제 왕이 강 건너 사찰에 예불하러 갈 때 먼저 이 바위에 올라 쉬어갔단다. 왕이 도착하면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졌다고 해서 ‘스스로 자(自)’에 ‘따뜻할 온(溫)’ 자를 써 이름을 붙였다. 실은 임금이 당도하기 전에 신하들이 불을 지펴 바위를 데웠을 것이다.
자온대는 부여 시민들에게 ‘엿바위’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엿처럼 끈끈한 바위이거나 엿가락처럼 생긴 바위인가 싶었는데, 뜻밖에 ‘엿’은 ‘엿보다’에서 나온 말이다. 강변에 솟은 바위가 부소산성을 엿보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재밌는 이름이다. 부여 사람들은 바위 인근 강변마을을 ‘엿바위 마을’이라고 불렀다. 행정지명은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인데, 규암이란 이름도 엿보는 바위란 뜻으로 ‘엿볼 규(窺)’에 ‘바위 암(巖)’ 자를 쓴다.
엿바위 마을, 그러니까 규암마을은 나루터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백마강변에 자리한 규암마을은 배로 오가는 사람과 물자로 번성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이 모여들어 큰 시장을 이루고, 사람이 모이니 상점과 주택 등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활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1968년 부여읍 동남리와 규암면 규암리를 잇는 백제교가 놓이며 상황은 달라진다. 유통의 중심지가 강 건너로 옮겨가면서 북적이던 거리는 한산해지고 건물을 채우던 이들마저 대부분 떠났기 때문. 지금 규암리는 쇠락한 옛 풍경과 근래 지은 오피스텔 등이 구분 없이 뒤섞여있다. 얼마 전부터 규암리에는 도시재생 사업으로 마을에 새 숨을 불어넣고 있다. 빛바랜 일본식 가옥에 감각적인 느낌의 가게가 하나둘 문을 열고 있다. 규암면 자온로와 수북로에는 책방과 공예상점, 게스트하우스, 카페와 식당 등 새로운 공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뉴트로 감성과 예술의 향기가 물씬하다.
백제 무왕 36년(634년) 조성된 것으로 전하는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이자 인공연못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 35년(634년)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신선의 세계를 모방했다. 봄에는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무왕과 그 왕비가 누구인가. 바로 ‘서동 왕자와 선화 공주의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과 백제무왕의 탄생 설화가 깃든 궁남지는 일본 정원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궁남지 일원 38만여㎡에는 매년 7~8월이면 가시연, 홍련, 백련, 수련 등 50여종의 연이 피어난다. 연꽃의 은은한 향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연꽃사이로 8㎞ 길이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다양한 수생식물과 각종 곤충, 왜가리, 물닭 등도 만날 수 있다.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했던 선조들의 미적취향을 잘 살렸다. 부여 시민들은 그래서 이곳을 ‘살아있는 생태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궁남지에서는 매년 여름 부여 서동연꽃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1,500년 전의 백제와 오늘이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