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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성 Jun 27. 2022

삼국지의 영웅 관우 장군의 사당, 서울 동묘

서울시 종로구 동묘  

도심 속 고적한 쉼터가 된 동묘 / 이하 ⓒ김종성

서울에는 내 조상의 묘도 아닌데 종종 찾아가게 되거나 약속장소로 삼는 이채로운 묘들이 있다. 그 가운데 문묘(文廟)와 동묘(東廟)는 중국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는 이색적인 사당이다. 여기서 묘(廟)자는 무덤(묘 墓)이 아닌 사당을 뜻한다. 사당은 조상의 신주나 위패를 모신 곳,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공간을 이른다.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종로구 종묘(宗廟)가 대표적인 곳이다. 일반적으로 제단에 ‘당(堂)’이 아닌 ‘단(壇)’이나 ‘묘(廟)’가 붙으면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성역임을 뜻한다.


성균관 대학교에 있는 문묘가 공자를 지칭하는 문성왕(文聖王)의 사당이라면, 동묘는 서울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의 장수 관우(162~219)의 동상을 두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다. 코로나19와 내부공사 등으로 문을 닫았다가 3년 만에 다시 문을 열고 시민들을 맞고 있다. 연중무휴이며 입장료는 없다. 


이곳은 무려 16세기 조선 선조 때 생겨난 오래된 사당으로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명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처럼 관우 장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크게 숭배하였다. 관우는 무운(武運)은 물론 재운(財運)의 수호신으로 점점 신격화되면서 관왕(關王)으로 받들어지게 된다.

없는 게 없는 동묘 벼룩시장

동묘는 지하철 동묘역이 도보 3분 거리로 가깝고 별별 볼거리 살거리로 풍성한 동묘벼룩시장이 곁에 있어 더욱 좋다. 저렴한 구제의류에서 각종 잡화, 덕후들이 좋아할 희귀품들까지 눈이 즐거운 벼룩시장에서는 없는 게 없다더니, 동묘의 주인공 관우 장군상도 팔고 있다. 동묘벼룩시장은 방문할 적마다 규모가 커지는 것 같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황학동 벼룩시장과 장터가 이어지더니, 신설동 서울풍물시장까지 골목장터가 길게 이어져 있어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인기장터가 되었다. 주말과 휴일에는 자전거를 끌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청계천변을 따라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광장시장 평화시장과 함께 각자의 특색을 잘 살린다면, 터키 이스탄불의 명소 ‘그랜드 바자르’처럼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될 것 같다.         

제사를 드리는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비석
관우상을 볼 수 있는 정전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달리 동묘에 들어서면 고적한 분위기가 시민들을 맞이한다. 툇마루가 있어 앉기 좋은 정자각, 오래되어 둥글어진 돌계단, 편안하게 쉬어가기 좋은 마당 등 도심 속 쉼터가 따로 없다. 수령 200살이 넘었다는 노거수 향나무들은 나무껍질이 용틀임하듯 혹은 꿈틀거리듯 서있어 400년이 넘은 사당의 분위기를 돋궈준다. 양쪽에 지팡이(거치대)를 짚고 서있으면서도 푸르른 잎이 무성하고 은은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동쪽으로 단(壇)이 조성되어 있고, 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건물이 있으며, 맞은편 북쪽에 중문이 있다. 중문 좌우에는 제사나 참배 목적 외에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의 금잡인비(禁雜人碑)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중문을 지나면 맞은편 기단 위에 관우 장군이 있는 정전이 자리 잡고 있다. 단층 건물인 정전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중국식 건물이다. 하나의 건물로 보이지만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 구조다.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 뒤는 관우와 부하 장군 들의 조각상을 두는 본실이다.

중국풍의 화려한 정전 내부
높이 2.5m의 금동제 관우상

정전 내부는 화려한 장식과 중국풍의 조각상 등이 돋보인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금동제 관우상은 구리 2.4t을 들여 만든 높이 2.5m의 거작이다. 관우상 뒤로 보이는 일월오봉도(一月五峰圖) 그림은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궁중장식화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은 음양(陰陽)을, 다섯 봉우리는 오행(五行)을 나타내고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대변하는 주인공으로 국왕을 상징한다. 정전 안에는 명나라 사신 숙종 영조 고종이 쓴 현판이 남아있다. 동관왕묘 소장유물 일괄은 서울시의 유형문화재 제365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관우 장군의 사당이 조선의 도읍인 한양에 세워진 연유는 뭘까? 그 배경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이 주둔지에 관왕묘를 세우면서다. 선조 31년(1598)에 명나라 장수 진인이 남대문 밖에 남묘(남관왕묘)를 세운 것이 처음이다. 


전쟁 중 관우의 신령을 보았다며 이는 관우의 덕을 입은 것이라 여겼단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완도의 고금도 성주 안동 남원 등에 관왕묘를 지었다. 전쟁이 끝난 후 1601년 친필 현판과 하사금까지 지원한 명나라 신종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동대문 밖에 조성한 것이 지금의 동묘(동관왕묘)다

동묘를 풍성하게 해주는 노거수 향나무
추녀 마루 위 친근한 잡상

선조 임금의 지시를 받고 동묘 건설을 맡은 이는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기도 한 허균이다. 관우 신앙은 점차 커지면서 고종 때엔 서울과 인천 강화도 전주 평양 개성 등 전국 곳곳에 관왕묘가 세워졌다. 참고로 관왕묘엔 여(呂)씨 성을 가진 사람은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관우가 여몽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1883년 건립된 서울 북묘는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가 자손번창과 복운을 위해 지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북묘로 피신할 만큼 관우신령에 의지하기도 했다. 1902년 세워진 서묘는 엄비(성이 엄씨인 왕비)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조성되었고, 관왕을 관제(關帝)로 격상시켰다. 


고종은 강력한 무신인 관우를 이용해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면서 일제는 동관왕묘를 제외한 전국의 관왕묘들을 철거한다. 일제가 관왕묘를 없앤 이유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전쟁하면서 세우기 시작한 사당이라 반일감정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 기사 내용 참조 : 동묘내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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