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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성 Jul 27. 2022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이뤄지는, 근현대사기념관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근현대사기념관

의암 손병희 추모 특별전이 열리는 근현대사기념관 / 이하 ⓒ김종성

북한산 자락 4·19카페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근현대사기념관(서울 강북구 우이동)은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항일의병, 3·1운동, 4·19민주혁명까지 치열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오롯이 담은 곳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4월 혁명의 투사들이 소원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상임을 알리고자 지난 2016년 설립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해 뿌리 내린 평등·자유·민주의 가치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곳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관련 국내외에서 발간한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더 오래 머물게 된다. 서점에서 보기 힘든 희귀하고 전문적인 책들이 많아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다. 강북구의 자랑인 북한산, 4·19민주묘지, 순례길, 봉황각 등을 소재로 만든 배치 책갈피 손수건 티셔츠 등 기념품을 파는 자판기도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화요일에서 일요일(09:00~18:00) 운영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누리집 : http://mhmh.or.kr

광복군 활동 전시물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이어지는 애국선열 묘소

근현대사기념관에서는 뜻 깊은 전시회가 열리곤 해 종종 들르게 된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 일가’,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을 재조명하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였던 동학농민혁명' 등이 인상적이었다. 잘 몰랐던 혹은 잊고 살았던 우리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다양한 사료(史料)와 사진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어 당시의 역사 속으로 푹 빠져든다.


전시물들을 찬찬히 관람하다보면 ’역사는 단순히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기념관에서 이어지는 북한산 둘레길엔 이시영, 이준, 광복군 등 20여 명의 애국선열 묘소가 있다. 나라의 독립을 향해 고난과 역경 속으로 뛰어든 훌륭한 선조들 앞에 자랑스러움과 함께 숙연한 마음이 드는 길이다.

항일 의병 전시물
1904년 일본 군용철도 폭파 후 총살당하는 항일 의병

1층 상설전시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통신원 매켄지가 기사와 함께 사진으로 남긴 항일 의병(義兵) 기록이었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호외를 발행해 을사늑약을 폭로하는 등 멸망해가는 대한제국의 암울함을 밝히는 횃불 같은 존재였다.


매켄지는 항일 의병을 취재하기 위해 충청북도 제천과 강원도 원주 일대를 찾아다녔고, 결의에 찬 의병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어 역사에 남겼다. 초라한 입성이지만 그 결연함만은 어느 나라 군대에도 뒤지지 않는 의병들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다보니 가슴이 절로 아릿해졌다. 일본을 이길 것 같으냐는 매켄지의 질문에 한 의병이 잊기 힘든 대답을 한다. 사진 속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복을 입은 젊은이였다.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의암 손병희 추모 특별전
평등·자유·민주에 투신한 손병희의 삶

전시관 2층으로 올라가면 의암 손병희 순국 100주기 추모 특별전이 9월 30일까지 열리고 있다. 흰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형형한 눈빛을 한 선생의 포스터 사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국가보훈처는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의 일생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종교인을 넘어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시대를 이끌었던 선생의 참뜻을 되새기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전시회 취지를 밝혔다.


손병희(1861~1922)는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 동학(東學)에 관심을 가지고 입도하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1906년 선생은 동학 3대 교주가 되었고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게 된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지도자로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요양 중 향년 61세에 임종한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봉황각 관련 전시물
천도교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세운 봉황각

특별전 관람을 하다보면 손병희 선생의 의로운 삶뿐만 아니라 그가 몸담고 치열하게 활동했던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 항일의병, 독립운동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선생의 유품은 물론 다수의 귀한 전시물과 함께 동영상으로도 자료를 보여주어 생생한 역사 공부를 하게 된다. 백범 김구가 해방 후 환국해서 처음 한 공식행사는 임정의 요인들과 함께 서울 우의동에 있는 손병희의 무덤을 찾아뵙는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구는 해주(북한 황해남도)의 접주(지역 관리자)로 손병희의 부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 인근에 손병희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무덤과 천도교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조성했던 봉황각(강북구 우이동)이 있어 함께 들르면 좋겠다. 봉황각은 대한제국시대의 건축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3년여에 걸쳐 교육을 받은 인원은 총 483명. 이들은 전국에서 3·1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그 가운데는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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