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할 자유를 달라

직장일가 다섯. 구내식당보단 백화점 회전초밥

by Cactus

한 분이세요? 이쪽에 앉으세요.


나는 조용히 1인석에 앉는다. 이 북적거리는 백화점 푸드코트 안에서, 그것도 돈이 가장 활발하게 도는 평일 점심시간에, 혼자인 손님을 기분좋게 받아주는 음식점은 이 회전초밥집 뿐이다. 아.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붐비는 백화점에서 평일 혼밥으로도 직원의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니. 초밥 한 점에 5000원도 기꺼이 낼 수 있다. 나는 사원증을 조용히 풀어 지갑 밑으로 숨기면서 말한다. 여기 미소된장국은 양껏 좀 주세요.


혼자 밥먹는 게 '본격적으로 편안해진 건' 이 회사로 이직을 하고부터다. 사실 예전에도 혼밥러의 낌새가 있긴 했다. 하지만 전 직장에선 언제든지 불러내 맛있는 걸 먹을 동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 땐 사회생활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게 회사생활의 큰 낙이었다. '혼자 밥을 어떻게 먹어?'라며 혼밥러를 애잔하게 바라보던 대학생으로부터 막 발걸음을 뗀 푸릇푸릇한 때가 아니던가.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었다.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이든, 남자팀원들과 야근하며 출석도장을 찍다시피 한 순댓국집이든간에.


하지만 전직을 하면서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일단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동기가 없어졌다. 이건 아마 대부분의 경력직, 중고신입에게 해당되는 말일 터다. 게다가 연차가 쌓이면서, 언제부턴가는 편하지 않은 누군가와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며 밥을 먹는 일이 업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일종의 '고역'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영혼이 1도 없는 질문에 영혼없이 대답했고, 관심이 1도 없는 상대에게 역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주말엔 뭐했어요? 주말엔 뭐해요? 명절에 시골 내려가요? 요즘 무슨 책 봐요? 영화 본거 있어요? 어휴, 일일 노예생활에서 겨우 한시간 주어지는 귀한 자유시간까지도 이 사람들과 매일 똑같은 질문만 하면서 보내야 하는 건가.


사적인 얘기만 하면 다행이게. 목적있는 점심시간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개는 밥을 먹다가 은근슬쩍 자신만의 '목적'을 던졌다. 아니 뭐, 이대리 이번에 tft 들어갔다며? 잘 부탁한다고. 신경쓰지말고 맛있게 먹어 허허. 대리님 그런데 혹시 김대리님이랑 식사자리좀 마련해주실 수 있어요? 아니, 이번에 예산 관련해서 상의할 게 있는데 조금 어려워서요. 대리님 동기시잖아요. 불행히도 나는 이런 류의 대화에 너스레를 떠는 사람이 못된다. 게다가 목적 있는 대화는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입과 식도를 거쳐 촉촉하게 위장을 흐르던 행복에 겨운 음식물들이 얼어붙고 만다. 한마디로 말해 '더럽게 불편하다'.


아. 그에 비해 초밥집은 얼마나 행복한 공간인가. 그 누구도 나에게 목적 있는 대화를 건네지 않는다. 나는 영혼없는 눈빛에 대고 허무한 대답을 날리지 않아도 된다.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다. 오물오물 식감을 만끽하며 맘 편히 식사하는 자유가 허락된다는데,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고 눈치볼 필요도 없다는데 그깟 몇만원이 대수더냐. 그렇다. 나는 기꺼이 내 월급을 투척해드릴 수 있다.


회전 트레이를 돌며 짠한 눈길을 보내는 연어초밥 접시를 휙 들어올린다. 보드라운 연어 속살에 갇힌 짭쪼롬한 밥알을 음미한다. 입이 심심해지기 전에 미소된장국을 털어놓으며 입안의 하모니를 느낀다. 아득한 고소함.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여기 얼마에요, 이거 빨리 계산좀요.

직원을 황급히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행복했던 밥알의 심취로부터 깨어난다.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좁은 너비의 넥타이에 조급함이 뒤섞인 얼굴. 그는 영락없는 내 또래의 회사원이다. 나는 흠칫 놀란다. 나처럼 평일 점심에 백화점 푸드코트로 찾아와 사치스러운 회전초밥으로 혼밥을 즐기는 똘끼있는 직장인이 또 있었던 것이다.

슬쩍 그의 목에 걸린 노비증을 염탐한다. 이근방 회사의 사노비가 분명하다. 노비는 노비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얼마나 짜증났으면 여기까지 혼밥하러 왔니, 나는 문득 애잔해진다. 너도 수많은 사람의 눈길과 눈치와 계산과 의미없는 질문을 피해 여기까지 왔겠지. 오죽하면, 오죽하면.


나는 황급히 계산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계를 본다. 1시 10분. 전국의 노비들이 잔뜩 부푼 배를 안고 소화도 안되게 모니터 앞으로 복귀하는 집합 시간이다. 나도 입안을 맴도는 밥알의 향연을 아쉬움으로 삼키며 일어선다. 초밥으로 쓴 오늘의 럭셔리 시발비용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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