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주는 사람 단 한명만 있어도.

달려라 얼룩말

by Cactus

이상하다, 나는 네가 마음만 먹으면 참 잘할 것 같은데.

고등학교 일학년 미술시간. 미적 감각이 없어 서예 빼고는 미술수업 A를 받아본 적이 없던 나는 그날도 요상한 작품을 의미없이 그려댔다. ‘너 마저 그려, 난 여기서 대충 마감할래’라며 짝꿍에게 정물을 건네는 순간, 미술선생님이 한마디 하셨다. ‘나는 네가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어’ 라고.


에이. 선생님 절 진짜 모르시나봐요. 전 미적 재능이 없어요. 내 말에 선생님은 교단에 턱을 괸 채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아니, 나 말고 네가 너를 진짜 모르는거야. 나는 왠지 네가 언젠가 그 미적인 감성을 확 분출할 것 같아. 너도 모르는 재능이 보인다니까.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 같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미술 선생님의 말이, 목소리가,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는 내 미적 능력을 신뢰하게 됐다. 없던 희망이 절로 생긴 건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회사 한 귀퉁이에서 그옛날의 선생님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조직원에 대한 매니징은 뒷전이고 업무 성과에만 혼을 다하는 팀장과 함께 일하며 나는 모든 의욕을 잃은 한마리 얼룩말이 되어있었다. 그래, 다가올 죽음만을 기다리며 가까스로 숨만 쉬는 얼룩말. 털썩 주저앉아 의미없이 하루하루 풀을 뜯어먹는, 화를 낼 에너지조차 없는 얼룩말.


그 때 그가 왔다. 팀원의 하나하나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맡은 일을 지금 팀장보다 몇백배는 더 깔끔히 해내던 전 팀장. 역시 참 잘하네. 라는 그의 말에 누워있던 얼룩말은 다시 천천히 풀밭을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시켜도 만족스러워. 라고 그가 말하자 얼룩말은 뛸 준비를 마쳤다. 언제 누워있었냐는 듯이.




전 팀장은 지금 팀장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팀장은 아무에게나 일을 시킬 뿐 팀원을 향한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고로 전팀장이 내뱉고 간 한두마디에 심폐소생한 얼룩말은 다시 풀밭에 드러누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직장에서 나의 실력을 믿어주는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얼룩말을 죽이지는 않는다. 죽어가던 얼룩말이, 앞으로 몇달동안은 뛰려고 버둥거릴 것이다.


그래. 우리는 우리를 믿어주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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