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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29. 2017

일상에는 이야기가 산다

영화: 최악의 하루 (2016, 김종관 감독)


  포스터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리는 때가 있다. 이 포스터도 능소화 가득 피어 있고 그 색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우 한예리의 말간 얼굴에 저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 표정은 과연 어떤 최악의 하루를 말하는지 궁금해졌다. 영화는 100분이 채 되지 않는데 그 한 순간도 흘려 보내기 아까울 만큼 좋았다. 주요 등장인물이 나오지 않을 때, 제작자 입장에서는 심혈을 기울였을지언정 관객 입장에서는 조금 스쳐 지나가기 마련일 그런 풍경 장면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커피가 놓인 테이블을,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부는 남산 둘레길을 예쁘게도 담았다. 그리고 그 골목길마다, 테이블마다, 샛길 하나하나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묻어 있을까 궁금해지게 만든다. 스틸 사진을 모아 놓은 듯 예쁘다.





  이 영화에서도 선명하게 보이지만 골목길마다 이야기가 산다. 가방을 메고 우당탕탕 뛰어가는 초등학생의 등에도, 누구든 보면 일단 성규 아니냐 묻는 할머니의 애처로운 손등 주름에도, 갤러리 마당에도, 벽이 높지 않은 집 앞에 가지런히 놓인 화분 위에도, 페인트 얇게 발린 벽 위에 그림자 늘어뜨리고 홀로 튀어 오르는 햇살에도 이야기가 조롱조롱 맺혀 있다. 그중 한 조각씩만을 곱게 잘라 소설로 쓰고 필름에 담고 무대에 올린다. 그 조각을 자기 목소리로 뱉어야 하는 직업, 배우가 되고자 하는 은희가 연기 수업에서 뻣뻣한 연기를 지적받고 나오면서 은희의 "최악의 하루"가 시작된다. 전에 만나던 남자,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오늘 처음 본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이 하루는 은희가 연기 수업에서 연습한 극중극 대사와 너무나 닮아 있다.


※ 이 아래부터는 영화 내용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므로,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됩니다.


 

  수업에서 나오자마자 은희에게 길을 물어 오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모른다. 서툰 영어로 대략적인 소통을 하면서 은희는 료헤이가 찾는 갤러리까지 길을 안내해 준다. 시간이 꼬인 료헤이가 커피 한 잔을 대접하면서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이제 막 첫 발을 뗀 소설가와 배우, 각자의 직업을 거짓말하는 일이라고 표현하며 두 사람은 어쩌면 서로의 삶에 깊이 들어오지 않을 타인이기에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은희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다.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결국 먼저 자리를 뜨는 은희는, 자기 이름을 묻는 료헤이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는 쉽게 밝힌다. 남산, 이라고 발음을 차근차근 잡아주기까지 하며.


  아침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현오(권율)는 은희의 현재 남자친구다. 사람도 많지 않은 남산 둘레길에서도 후드티 모자를 푹 덮어쓰고 선글라스에 까만 마스크까지 낀 모습이 오히려 시선을 잡아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현오의 대사는 주로 '네가~'로 시작되는 은희 탓이다. 네가 이상하고 네가 잘못이고 하여튼 자기는 다 잘났다. 그런 모습에 은희가 짜증이 안 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함께 있는 시간답지 못한 그 모습에 마스크를 벗기고 선글라스도 빼앗아 웃고 있던 은희를 "유경아!"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때마침 촬영에 들어가야 해서 은희를 따라갈 수도 없는 현오를 버려두고, 선글라스를 와그작 밟아 버린 은희는 분노의 하산을 시작한다.


  잠시 머리를 식히듯 멈춰 서 있는 은희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은희가 현오를 만나기 전에 올린 SNS를 보고 마음이 동해 찾아온, 과거에 만났던 남자 운철(이희준)이다. 현오와 소원해진 사이 만났던 운철이 유부남임을 알게 되면서 끝난 듯한, 사실 어디 가서 이야기하기도 뭣한 관계라는 게 대화에서 어른어른 비치지만 운철은 계속해서 은희에게 자기 마음을 알아주기를 종용한다. 은희를 세기의 운명 대하듯이 말하는 그와 은희는 결국 잠시 카페에 앉는다. 오늘의 두 번째 커피다. 그러나 첫 커피를 마실 때와는 달리 대화에 진전이 없다. 결국 운철은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행복해지지 않기로 했다는 둥, 은희 씨는 그래도 내 마음 알아야 한다는 둥 오만 말을 다 갖다 붙이고 있다. 현오와 만날 때는 분노로 그렁그렁해졌던 눈에서 이번에는 비참함의 눈물이 흐른다.


  그러는 동안 료헤이도 오늘의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다. 시간 약속도 잘못 잡았고, 점심 드시겠냐 묻더니 자기는 먹었다고 덧붙이는 출판사 대표를 만나 자기 책이 홍보도 판매도 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쓰게 웃었지만 료헤이의 하루도 썩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 출판사 대표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하던 출간 기념회에는 단 두 사람이 왔으며, 그들도 책을 읽고 찾아온 게 아니라 그냥 길 가다 들어와 앉았을 뿐이었다. 료헤이의 두 번째 커피도 그다지 즐거운 테이블에 놓인 것 같지는 않다.



  은희의 하루는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다. 의도치 않은 삼자대면. 은희는 머리를 쥐어뜯지만 아무 변명의 말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은희를 몰아세우고는 소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자며 내려가 버린다. 따라가지 않는 은희에게 거기서 땅 파고 뒈지시든지, 하는 말만 남긴 채. 결국 땅거미가 내리는 남산 둘레길에 은희는 혼자 앉아 있다. 나직하게 극중극의 대사를 읊어 본다. 난 항상 솔직했는걸요. 은희의 연기는 한결 자연스러워져 있다.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말도, 항상 솔직했다는 말도 은희에겐 진실이다. 얼핏 모순되는 말 같지만 은희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그를 위해 사소한 거짓말을 덧댄 것이니까. 하얀 거짓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하겠지만, 적어도 은희를 보면서만큼은 진실이라 답하고 싶었다. 냉정하게 따져 은희의 솔직함은 결국 양다리라는 단어로 환원될 뿐이지만, 현오나 운철도 결국 다 양다리인 셈인데 은희만 잘못한 것처럼 몰아세우고 있는 두 사람에 비해 은희는 그래도 상대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며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삼자대면 때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끊임없이 제 입장, 제 마음만 구구절절 외치며 다 은희 잘못인 것처럼 말하거나 은희를 닦달하지 않았는가. 은희야 도망쳐...라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이 인물들도 양다리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 사이에서 은희만을 지탄할 이유는 없다. 은희는 적어도 최선을 다했다. 연극 무대에 있는 동안만큼은 무대 위의 이야기만이 진짜이듯, 자잘한 거짓말은 그 무대에 최선을 다하는 은희의 애드리브 정도였다.

  


  지친 하루 끝 다시 만나게 된 료헤이에게 은희는 하루가 어땠냐 묻는다. 차마 좋다고는 대답할 수 없어서 'Not bad'라고 대답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하루는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이 하루는 최악의 하루일까? 은희를 끊임없이 몰아세운 날이고, 극중극 대사처럼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망쳐버리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고서야 어쩜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기가 막히지만, 그래서 당일 밤에는 잔뜩 지쳐 최악의 하루였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기억되는 하루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료헤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은 것처럼 주인공은, 은희는 꼭 행복해질 테니까.



  료헤이에게 무심해 보였던 출판사 대표에게도 심란한 인생사가, 나중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웃지만 웃는 게 아닌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 있다. 아마 현오와 운철도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의 구구절절한 인생사를 어디선가 풀어헤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은희뿐 아니라 우리 일상을 걸어 다니는 누구에게나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료헤이와 은희도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료헤이는 소설을 쓰고 은희는 몸으로 말한다. 절뚝이는 하루를 보냈지만 은희는 끝을 알지 못하는 길을 같이 걷자 말하고 료헤이는 끝이 반드시 해피 엔드일 거라 말한다. 은희는 남산 둘레길을 이야기했고 료헤이는 자기 소설을 이야기한 거지만 어쩌면 그 말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같지 않은 언어로 더듬더듬 이어가는 인연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폭 포개져 두 사람이 나란히 선 엔딩이 너무나 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은희의 연기는 뻣뻣함을 벗었고 료헤이는 처음으로 해피 엔딩을 생각해 냈다. 때로는 "최악의 하루"가 태풍처럼 부수고 간 자리에 바다 온도가 정상화되고 일상성이 회복되는 일이 있다. 그 순간의 양가감정을 우리는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거 아닐까? 복잡하고 머리 아팠을 은희의 하루는 역설적으로 은희의 해피 엔딩을 가리키며 끝났다. 관객이 은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은희가 행복했으면 바라게 만드는 예쁜 모습을 한 아름 안겨 주고서.



  몇 년 전 부쩍 스트레스가 쌓였던 어느 날이었다. 가장 예쁜 옷을 입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아무 약속도 잡지 않은 채 북촌 인근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크레페가 반가워 딸기 잔뜩 얹은 걸로 하나 들고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북촌 사랑방에 앉아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며 일기를 썼다. 아무도 없는 한옥 마루에 앉아 있자니 멀리 여행이라도 온 듯 호젓했다. 주변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내 속에서 악머구리 끓는 듯한 기분이 들 때는 그렇게 혼자 훌쩍 떠날 필요가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그래서 북촌 인근의 오래된 골목들은 내게 언제나 기분 좋게 걷는 거리, 해소의 기분을 주는 거리다.


  이 영화를 본 이후로는 그 골목을 더 설레는 마음으로 걸을 것 같다. 이 골목 어딘가에 묻어 있을 수많은 이야기, 분절되지 않은 그 이야기에서 한 토막을 잘라내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문학이고 영화라고 한다면-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 나는 단편 영화 수십 편을 끄집어내며 걷는 셈이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구를 떠올려 본다.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낸 감독의 다음 영화, <더 테이블>도 보러 가야겠다. 한예리가 은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니 기분 좋은 향수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영화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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