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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05. 2017

1인칭과 1인칭 사이

영화: 우리의 20세기 (2017, 마이크 밀스 감독)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영화를 감상하고 쓰는 글로, 이 영화의 국내 개봉일은 9월 27일입니다.


* 미개봉작이니만큼 스포일러 없이 쓰고자 하여, 영화 소개란에 나온 시놉시스 이상의 내용을 넣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놉시스 자체가 워낙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어 그보다는 많은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감상에 방해가 될 정도로 큼직한 스포일러가 되는 내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영화를 보러 가기 전 검색창에 영화 제목을 넣어보는 일은 꽤나 기분이 좋다. 꼭 착실한 학생이 되어 예습하는 기분으로 영화감독과 배우는 누구인지, 공개된 스틸컷은 어떤지, 나보다 먼저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떤 한줄평을 남겼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략의 시놉시스가 어떤지 파악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그 배우가 이런 역할도 하다니!" 혹은 "그 스틸컷이 이런 장면이었구나..." 하고 놀라기는 해도, 영화를 보기 전 검색하면서 크게 놀랄 일이라곤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검색해 봤을 때에는 조금 의아했다. 첫 번째, 20th Century Women이라는 간략하고 또렷한 제목이 <우리의 20세기>로 번역된 것. 두 번째, (지금은 수정되었지만) 포털에 올라온 시놉시스가 단 두 문장인 것.


모두에게 인생은 처음 살아보는 것이고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다.
서툰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를 위해
1979년 산타바바라의 다섯 남녀가 전하는 러브레터.



  영화는 1979년 산타바바라라는 지역에 도로시아(아네타 배닝)네 집을 배경으로 한다.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 집세 내고 사는 애비(그레타 거윅)와 윌리엄(빌리 크루덥), 제이미의 방에 들어와 잠을 자고 아침에 몰래 나가지만 제이미와 친구임을 분명히 하는 줄리(엘르 패닝) 다섯 명이 주요 인물이다. 보통 포털의 영화 소개란에는 이 정도 주요 인물과 그들이 영화에서 꾸려 가는 굵직한 사건 선 정도는 서술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왜 그런 간략한 설명조차 생략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영화도 분명 다른 영화들처럼 사건과 사건이 고리를 물면서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긴 하지만, 블록버스터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들처럼 굵직하고 또렷한 구조는 아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잔물결처럼 은은하게 흘려보내는 대신 이 영화는 인물들의 관계를 더 섬세하고 탄탄하게 보여주는 데 더 공을 들인 느낌이다. 누군가 내게 "지난 일주일 간 뭘 했어?" 물으면 기승전결 선명하게 이야기하기 어렵듯이,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구구절절 읊으면서 그 느낌을 설명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인물 설명이 생략된 것도 영화를 보는 순간 곧장 의문이 풀렸다. 영화는 내레이션을 아주 많이 사용하는데, 캐릭터 자신의 입으로, 혹은 주변 캐릭터의 입으로 그 인물을 차곡차곡 서술해 간다. 마치 소설을 한 줄 한 줄 아껴 읽어가는 기분이 든다. 언제 태어나 무슨 일을 겪으며 여태까지 살아왔는지, 지금 어떤 담배를 피우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영화를 보면서 한 겹씩 쌓인 그 정보를 통해 관객은 마치 산타바바라의 그 집이 우리 옆집이라도 되는 듯 인물들을 소상히 알아가게 된다. 어떤 담배를 피우는지, 어떤 사진을 찍는지...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인물들은 대화를 나누고 독백을 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독백을 통해 우리도 인물들을 알아간다. 다섯 인물 모두 얼마나 뚜렷한 개성과 특징, 취미와 배경을 갖고 있는지. 어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내겐 너무나도 의미 있게 느껴졌다. 대화는 특정 세기의 전유물이 아니건만 그 모습은 어쩐지 너무나 20세기스럽다는 생각이 왜 들까, 짚어보다 보면 이토록 사소한 대화를 나눌 틈이 없는 21세기를 돌아보게 된다.


  그때는- 실력이 모자란 밴드가 더 나은 실력을 지향하기보다는 실력보다 표현 열정이 더 크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며, 종이에 연필로 아무렇게나 북북 긋듯이 자기 감성을 폭발시키던 시대. 그리고 지금은- 실력이 모자란 아이돌 가수가 실력보다 다른 것들을 더 키우도록 요구 받으며 철저하게 계산된 감성을 절제하여 드러내는 시대로. 많이 달라진 우리의 모습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몇 번이나 <미드나잇 인 파리>의 교훈을 생각하며 20세기 찬양으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우리의 20세기>라는 제목은 얼핏 응답하라 시리즈나 <나의 소녀시대>를 연상하게 만들지만 이 영화는 단지 향수에 젖어 옛날을 그리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마치 필름을 잘못 현상해서 인화된 사진처럼 오색찬란한 그림자가 저화질로 묻어나는 연출은 지나간 시대를 생각나게 하긴 한다. 닉슨과 레이건, "하드코어" 페미니즘, 우리가 아는 그 모습으로는 처음 등장한 임신 테스트기나 피임약, DES의 부작용, 밴드 이름들,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그 시절 히피스러운 젊은이들 사진 등 많은 시대적 상징들도 등장한다. 그럼에도 단순히 격동의 70년대를 되그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함께 한 시간의 결과로 주어지는 성병과 피임을 놓고 고민하는 건 어째서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십중팔구 여성들이며, 그때도 지금도 어머니와 아들은 알지 못하는 서로의 모습에 당황하고, 수많은 남사친 여사친들은 서로 사이의 선을 두고 여전히 씨름한다. 즉 20년대생 어머니와 60년대생 사춘기 아들이 고민하는 갈등 양상은 60년대생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 90년대생 딸을 두고 하는 갈등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달력은 시간이 갈수록 그 숫자가 커지지만 우리 개인이 사는 각자의 삶은 그 숫자와 같이 커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우리는 항상 삶이 새롭다. 새삼스러운 이 명제조차 새롭다.


이들의 집은 늘 미완성 상태다. 타일도 깨져 있다.


  영화를 보면 이들이 사는 집은 항상 미완성 상태다. 윌리엄이 천장을 뜯어내고, 작업복을 입은 도로시아가 계단 난간을 사포질 하고, 제이미의 방에는 사다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언제 보아도 미완성 상태지만 누구도 그걸 불편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집이다. 영화 초반에 도로시아가 지나가듯 말하는 바에 따르면 1905년에 지어져 부잣집이었던 시절부터 시작해, 불도 나고 히피들의 숙소도 되는 등 다채로운 역사를 가진 집이다. 이 집은 거기 사는 사람들을 닮았다. 더 정확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닮았다. 10대든 20대든 50대든 상관없이, 내가 얼마나 최선의 선택을 해왔는지와 상관없이, 너와 내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조차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을 직면하고 그때그때 나의 언어로 새로운 조각을 내 삶에 덧붙이며 살아간다. 그 과정을 유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지난 조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렵겠지만, 예측할 수도 없고 마음먹은 대로 이끌어갈 수도 없는 우리 삶에서 그런 유연함만큼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이 없다.


  상대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 상대를 옭아매기도 하고, 애정을 갖고 충분히 질문하고 부지런히 응답했음에도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 자식 간임에도 서로를 너무나 모르며, 모르다 못해 서로를 모른다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 사실을 깨달으며 놀라게 된다.


  오래전 대학 입시를 위해 가족관계 증명서인지 등본인지 뭔지를 떼러 갔을 때, 나는 같은 집에서 매일 보는 엄마 아빠의 이름 석자와 그들이 가족이 된 역사가 간략하게 적힌 한 장의 종이를 받아 들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내가 모르는 엄마 아빠의 역사, 나는 처음으로 엄마 아빠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이상하다. 나는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자주 하는 말도, 어떤 감정으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꽤나 잘 아는 편이니까. 그러니까 아주 이상하지만- 우리는 상대를 안다기엔 너무나 모르고, 동시에 모른다기엔 너무나 안다. 그리고 그런 신비를 세상 그 어느 형용사로도 온전히 꼭 담아낼 수 없어서 우리는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를 쓴다.





  한편 "20세기 여성들"이 보여주는 당당함도 이 영화의 한 축을 이룬다. 간혹 서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불편함을 느껴 온 이들이 비명을 내지르듯 뿜어내는 소리가 편안하게만 들릴 수는 없다. 기이한 행태를 보이는 집단이 비단 어느 한두 곳만은 아닐진대 유독 개중에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집단에게만 입막음을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기행과 범죄에는 침묵했지만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사람들의 기행과 범죄만큼은 눈에 불 켜고 뒤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도 그런 의미에서 불편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든 영화 속에서든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당당한 인물들, 그러면서 변해 가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여정의 한 순간일 뿐이다. 모든 사조는 튀어나올 때 폭발적일 수밖에 없으며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자기 색깔과 길을 찾아갈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 색깔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불편해할 때도 있고 머쓱해할 때도 있지만 한 테이블에 앉아 시키는 대로 해보기도 한다. 나이가 많든 적든 성별이 어떻든 상대를 윽박지르지 않는다. 20대인 애비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10대인 제이미에게 좋을 법한 것들을 고민하고, 윌리엄은 윌리엄의 자리에서 도로시아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며 애비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본다. 도로시아는 아들인 제이미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제이미는 줄리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도 줄리를 종속하려고 밀어붙이는 일이 없다. 다섯 인물들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다. 그리고 페미니즘 코드는 외계에서 온 괴생물체가 아니라 이런 배려와 애정의 관계 위에 그냥 있다.


  이 영화의 원제 20th Century Women을 "해석"해 보라 한다면 열 명 중 아마도 열 명이 "20세기 여자들" (혹은 여성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제목은 <우리의 20세기>로 "번역"되었다. 도착어가 한국어이기 때문에 그 현재 맥락을 반영한 게 아닐까 싶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그러나 학부 때도 설렁설렁 듣던 번역 이론이 뜬금없이 이렇게 선명하게 되살아난 이유는 분명 내가 그 맥락을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무실 최초의 여직원이었던 도로시아의 눈에는 그 '하드코어 페미니즘'이 위험하거나 불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을 위협해 오는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면서 애비와 줄리가 체득한 페미니즘은 도저히 현실에 과격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70년대 페미니즘과 맞닿은 부분이 지금 한국 사회에도 있는 것 같다. 특정 집단 간의 알력으로 치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도저히 그렇지 않은 현실. 페미니즘이 사실은 도처에 있다는, 그 선명하고 예민한 현실 때문에 <우리의 20세기>라는 중화적인 느낌으로 번역했을 가능성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관점에 따라 누군가는 아주 잘 한 번역으로, 누군가는 아쉬운 번역으로 생각하겠지만... 원작자의 의도는 몰라도 그와 상관 없이 이런 시사점을 남길 여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좋다. 아무튼 살아 본 적 없는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건 이 영화 제목도 마찬가지니까 앞으로의 반응을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68 혁명의 여파가 밀려오고 반전 운동이 폭발하던 70년대도, 다른 것의 여파와 다른 운동이 휘몰아치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살아 본 적 없는 시대를, 오직 1인칭으로만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 길고 긴 내레이션을 통해 그토록 또렷하게 만들어낸 1인칭과 1인칭 사이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하고, 함께 하면서 서로의 그림자가 겹친 자리, 그 자리가 2인칭이다. 그 시절의 큼직한 문화 코드에서도,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 자리를 사소한 구석구석 더듬고 있다.


  부디 우리에게 그런 서로의 사소한 일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한다. 그건 20세기 만의 특권은 아닐 테니까. 비록 그런 대화가 훨씬 어려워진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그래도 불가능하진 않다. 내 앞에 선 사람이 집이라면 그 내부는 언제나 건축 중 혹은 수리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런 서로를 다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네가 있으면 된다는 말로 자기 자신과 상대를 든든하게 세워 가면서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지금 이 시간이 "우리의 20세기"처럼 흘러가고 우리는 또 비슷한 영화를 함께 보며 웃고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구글 검색/그린나래미디어 트위터(@greennarae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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