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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11. 2017

삶의 언저리에서, 시

영화: 시인의 사랑 (2017, 김양희 감독)

  시는 무엇일까.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같은 질문을 던지셨을 때 느꼈던 아득한 기분은 십수 년이 흐르고 그 사이 다수의 문학 작품을 접했음에도 변함이 없다. 여전히 그 질문은 내게 모호하고 아득하며 지극히 주관적인 답안이 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다. 이 영화 또한 내가 읽고 외고 끄적거리던 시와는 전혀 다른 누군가의 시를 담고 있다.


  <시인의 사랑>이 가진 강점 중 하나는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나 김소월 같이 이름만 대도 대부분 아는 시인이 있을 정도지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같은 시구들이 거의 관용구처럼 사용되지만, 서점에는 가볍고 예쁜 시집 시리즈가 즐비하지만, SNS에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신다니요' 캘리그래피 같은 것이 나돌아 다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는 장르는 우리의 일상과 살짝 거리감이 있다. 그 낯섦을 십분 이용해 마치 잔잔한 인디 음악 같은 느낌으로 마케팅을 해 왔다. 유명 배우들이 나직나직 시를 읊는 영상, 시판되는 시집 모양을 한 포스터, 감독이 직접 브런치에 기록한 제작기 등은 이 영화를 낯섦과 익숙함 그 사이 어딘가로 데려다 놓았다.



  그래서 그 마케팅을 보며 기대치가 높아졌지만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고 무척이나 실망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스토리였다. 밥벌이 하는 일상과 거리를 두고 무료하게 삶의 가장자리를 거니는 예술가, 돈으로 웃음으로 밥상으로 마음으로 예술가를 그 삶의 터전에 애써 접붙이면서도 "억척스럽다"는 러프한 단어로 묘사되기 십상인 예술가의 아내, 그리고 그 아내에게는 없는 싱그러운 젊음을 가져 예술가를 흔들어 놓는 젊은 인물. 작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다지 보고 싶지 않지만 많이 보아온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 시놉시스를 읽고 이 영화를 봐야 할까 고민을 했다.


  그럼에도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에 참석 버튼을 누른 건, 적어도 그 삶의 가장자리를 거니는 예술가의 시간 안에 있는 괴로움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 구상하고 찍은 영화였다는 데 일말의 기대를 걸어 보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영화를 미리 접한 사람들이 호평을 했다는 증거인 전주 국제영화제 관객상 시상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인생 영화까진 아니어도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처럼 기분 나쁘게 나오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그러한 관계를 미화하지 않은 연출,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호연이라 대답하겠다. 감정선을 미화하지 않아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해시켰고, 그걸 탄탄하게 보여주는 배우들의 호연이 있어서 식상한 시놉시스는 그 틀에 갇히지 않았다.



** 여기 아래로는 스포일러가 되는 내용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 글은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우선 시인 역할의 양익준을 나는 이 영화에서 처음 보았다. 그러나 나는 양익준을 보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내가 본 건 오직 남루한 옷차림과 그보다 더 남루한 표정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이었다.


  사실 이 시인은 내게 있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시인이라는 캐릭터의 행동이나 반응 하나하나가 많은 순간 내 분노를 자아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그 "억척스러움"에 그의 예술적 감성이 찌그러지고 깨지는 소리를 나도 영화에서 분명히 들었지만,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아내와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지 않고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가 아내에게 너무 잔인했다고 생각한다. 소년에게 같이 떠나자고 할 때는 자기가 뭐든 하면 된다고 했으면서 왜 아내에게는 그 '뭐든'을 하지 않았는지. 랭보나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처럼 먼 훗날 호사가들의 말과 글에서는 흥미롭게 되살아날지언정 당대의 호사가들에게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법한 이야기이다.



  그건 그냥 극 중의 한 캐릭터가 나라는 한 관객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영화적으로는 양익준의 연기력이 모든 걸 설명하고 이해시킨다. 이해받지 못하는 그의 고독이 분명하게 내비치고 있다. 그를 한없이 고깝게 보는 한편으로 나는 삶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리는 그를 동정하기도 한다. 담배를 꺼내 물거나 멍하니 앉아 있거나 버스 차창 밖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의 불안정함이 깃든 표정. 부유하는 듯 그 안에 있고, 곁에 있는 듯 머나먼 시인의 거리감을 양익준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를 나의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전혜진은 시놉시스에서 본 "억척스러움"에 아내가 갇히지 않도록 연기한다. 아내는 끊임없이 일을 하고, 수면양말에 잠옷, 패딩 조끼 같은 옷을 대충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름답다. 전혜진이라는 배우의 얼굴이 예뻐서만은 아니다. 시인의 일상이 햇빛 쨍한 날의 음지처럼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라면, 아내는 그 음지에 빛을 쏘아 보내며 통통 튄다. 아내가 시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도 하지만 행동으로도 표정으로도 수도 없이 전해진다. 그리고 시인도 아내도 그 친구들도 관객들도 아는 시인의 수입이나 현상이 어떻든지 간에 아내가 지금 상당히 행복하다는 것도.


  여기에는 소년에게 느낀 시인의 감정을 과하게 미화하지 않은 연출이 한몫했다. 시인과 소년의 감정 선이 펼쳐지는 곳 배경은 뜬금없이 거기만 뽀샤시 효과가 들어간 환상 속의 제주가 아니다. 버려진 인상을 풍기는 한밤중의 수영장, 가난과 질병과 거기에 짓눌린 사람들이 덕지덕지 괴로움을 표출하는 소년의 집은 시인이 소년에게 느끼는 감정에 측은함을 가미해 관객이 그 감정을 조금 더 같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세상 유일무이한 사랑처럼 표현했다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을 텐데, 그런 뽀샤시한 효과는 거의 없을뿐더러 굳이 찾는다면 오히려 시인의 아내와 함께 있다. 뒤쪽에 있는 창문에서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어느 낮, 가게에서 팔 물건을 포장하면서 웃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 그렇게 아내는 당당하고 행복하다. 아내 자신의 대사에서 거침없이 표현되듯 아내는 경제력을 비롯해 결혼 생활을 유지해가는 능동적인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보니 시인이 아내를 떠나려던 장면에서 개인적으로는 그간 보아온 두 사람의 감정 선상에서 살짝 더 나간 기분이 들어 조금 의아했다. 전반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후반으로 갈수록 덜 표현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소년과 시인의 관계에 집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초반에 보여준 아름다운 아내의 캐릭터가 갑자기 뒤쪽으로 밀려난 기분이 들어 조금 아쉽기는 하다. 그래도 시놉시스를 읽을 때 막연히 상상했던, 불륜의 애절함을 더욱 강조하며 부자재처럼 사용되는 "억척스러운" 캐릭터 느낌이 아니어서 좋았다.


  소년은 가뜩이나 세상 혼란스러운 나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그에 가진 애정으로 인해 어디로든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소년이다. 온실 속 난초처럼 순수하고 고운 소년으로 묘사되었다면 불편했을 텐데, 소년의 캐릭터 자체가 또 소년과 시인의 감정선에 이유를 부여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걸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어리고, 매우 거친 것 같지만 사실 내면에는 감성적이고 어린 면이 숨겨져 있는 소년이다. 아파서 누워 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픈 아버지보다 돈 한 푼이 급한 어머니에게 아쉬움이 드는 마음.


  시인과 같은 감성을 가진 소년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떻게 보면 시인이 아내에게 느끼는 감정을 닮아 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시인과 소년이지만 그들이 가진 감성과 주변 환경, 그리고 거기 속하지 못하는 그 어색함 가운데 있다는 공통점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얽힌다. 그리고 그런 공통점으로 아내까지 세 캐릭터는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완성시키고 의미를 부여하며 탄탄하게 연결된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사람을 묶어 "작가님"이라 칭하지만, 그 덕분에 듣기만 해도 볼이 발그레해지는 이런 호칭을 가끔 들어보게 되었지만 나는 나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뛰드하우스에서 한창 나를 공주님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내가 공주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듯이.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쓰고 싶지만 내가 작가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앞으로 글로 재정적인 수익을 얻게 된다 해도 그럴 것 같다. 그럼 차이는 뭘까? 등단 여부? 쓰는 장르가 문학인지 아닌지? 글쎄.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하다.


  어쩌면 나는 삶의 언저리를 서성거리며 관조적으로 삶을 사색하는 이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걸까? 그래서 그들과 내 자리에 선을 긋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 속 시인처럼 살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평탄하게 즐겁고 평탄하게 어려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설령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해도 내게는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의지가 없으니까. 지금 누가 봐도 "작가"라 불릴 사람에게도 이 시인의 결정에 대해 나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작가는 나와 분명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 무언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것. 어쩌면 그 덩어리가 시일까. 그 시를 생필품으로 여기는 사람과 사치품으로 여기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시를 읽고 외고 끄적거릴 때마다 내 마음에 조금씩 차오르던 감정이 없어도 나는 살겠지만 그게 없이는 삶이 도저히 남루해 견딜 수 없는 이들이 예술가가 아닐까? 예술가가 아닌 나로서는 정의 내리거나 상상할 수가 없다. 다만 이런 영화를 통해 남의 집 창문 안을 들여다보듯 보는 시간이, 시놉시스에서 느꼈던 그 좋지 않은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별로 싫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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