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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13. 2017

이제는 말해야 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017, 김현석 감독)

  올해는 참 영화에 대한 논쟁이 많았던 것 같다. 나처럼 문외한인 사람이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그토록 세심하게 살펴본 것도 처음이었다. 다양한 주제로 논쟁이 있었고, 논쟁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 논쟁이 반가웠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의 불편함이 꼭 100% 반영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쉬이 나올 수 있는 분위기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장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논쟁의 필요성 자체를 묵살시키는 발언이 그래서 불편했다. 그 과정이 누구에게나 그랬겠지만 피로하긴 했다.


  그러다 보니 그 모든 논쟁에서 비껴갈 이런 '착한' 영화가 반가웠다. 나문희와 이제훈이라는 배우에 대한 탄탄한 신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소재로 한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탄 시나리오, 예고편에서 보여 준 유쾌함. 무엇보다도 그런 논란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누구나 편안하게 관람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 스토리라인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예상하는 그대로지만 원래 이야기의 구조란 뜯어보면 다 그런 것이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하이킥에서 "호박고구마!"를 외치던 나문희 여사를 기억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여전히 찰지게 소화하는 나옥분 여사의 모습이 반가울 것 같다.'위안부' 피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안고 가면서도 영화가 유쾌한 톤을 함께 잡고 가는 건 정말이지 나문희의 연기 덕이다. 때로는 야무진 민원왕 도깨비 할매의 모습, 때로는 중엄한 역사의 증인 모습을 모두 보여주면서도 나문희가 갖는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힘을 십분 살려 '이웃집 할머니' 느낌을 주어 오히려 울림이 크다. 사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은 굉장히 특별하게 선택된 분들이 아니었다. 이웃집에 있다가 끌려갔고, 우리 동네에 살다가 삶을 빼앗긴 그냥 평범한 이들이었고 지금도 원래는 그러해야 맞다. 특이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뿐 여전히 '우리'라는 테두리에 같이 계신다. 우리 밖에 있으면서 곁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유쾌하고, 맛있는 것 같이 먹고, 그렇게 일상을 같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교과서 속이 아닌 일상 공간에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데리고 온다. 기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동일 소재를 한 영화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꼭 교과서에 역사로 정리해 기록되기라도 한 것처럼 일정하게 흐름을 갖고 우리 곁으로 왔다. 이전에도 여러 작품에 그 그림자가 직/간접적으로 스쳐 갔겠으나 90년대생인 내 기준으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2009년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이다. 사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시간상으로 먼저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고, 고등학생 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라는 제목을 들은 게 내겐 처음이었다.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과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기록이었다. 대단하게 흥행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 제목은 내 마음에 쾅 박혔다.


  2015년에 개봉한 <귀향>은 일종의 센세이션이었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연출이나 의상, 몇몇 표현, CG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꽤 있었다. 사실 이 말도 조심스럽다. 유명 평론가가 이 영화 별점을 낮게 줬다가 블로그가 난리 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러나 영화로서의 느낌이 별로였다는 것과 그 소재의 중요성을 안다는 건 다른 문제다. '위안부' 피해자를 극 영화로 담아 일정의 흥행을 이루었다는 것, 그 과정에서 클라우드 펀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는 것, 그 자체로도 이 영화는 이미 잊힐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내 기억에 스토리와 캐릭터보다는 스케치 느낌으로 기억된다. 이 문제의 큼직한 뼈대를 보여준 영화라는 느낌이다.


  그런 영화가 나오고 나자 조금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가닥을 잡는 영화들로 옮겨 가기 시작한다. <귀향>이 장면 스케치였다면 이 이후로 나오는 영화들은 차차 구체적인 캐릭터를 더욱 앞에 내세워 인터뷰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우리 눈에 익숙한 아역 배우들이 나와 조금 더 가까이 온 느낌이었던 <눈길>이 있었고, 보다 생생한 캐릭터로 찾아온 영화가 이 <아이 캔 스피크>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귀향>이 "정공법"이라면 이 영화는 "우회적"이라고 말했다. 전자가 교과서적 정의를 풀어낸 느낌이라면 후자는 보조 교재에 나온 예시를 풀어낸 느낌이랄까. 전자도 중요하고 후자도 의미 있다. 이건 물리 법칙이나 수학 공식이 아닌, 실제로 살아 숨 쉬고 짓밟히고 괴로워하고 죽어가고 살아남은 '인간' 이야기이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사례가 쌓이고 쌓여 정의가 되고 스케치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아래로는 스포일러가 되는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이 영화는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억지로 정리하는 이 과정이 오히려 딱딱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는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곁으로 왔다.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힘이 아닐까? 여태까지 있었던 동일 소재의 모든 소중한 영화 중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는데, 대사 구석구석에서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 문제에 대해 해야만 할 말을 하고, 들어야만 할 말을 들려준다. 나옥분 여사의 증언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침을 매우 명확하게 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젊은이이자 남성인 민재(이제훈 분)의 입을 빌어 나옥분 여사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증언을 하고 나오는 장면에서 연신 공세를 퍼붓던 하원 의원들이 나오면서 나옥분 여사에게 한 마디씩 하고 가는 장면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남성 의원들은 I am sorry,라고 하는 반면 여성 의원은 그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가해자가 아닌 남성들도 사과의 주체로 둠으로써 이 문제가 단지 한국과 일본의 민족 문제가 아니라 반인륜적 전쟁 범죄이며 인류 보편적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한 범죄의 피해자들을 정치적 협상의 도구로 삼았던 과거 정치인들, 막말을 일삼았던 (우리가 이름을 아는) 일부 남성 몇몇을 생각하면 이 사과가 더욱 고맙다. 여전히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2016년에도 "불가역적 합의"를 외친 정치인이나 이 문제에 둔감했던 젊은 세대를 대신한 사과라고 느껴졌고, 특정 남성의 잘못은 아니지만 전쟁의 주체는 주로 남성이었던 반면 전쟁의 피해자는 주로 '아녀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이 사과가 배려라고 느껴진다.



  여기에는 나문희라는 배우가 빛나는 만큼이나 그 과정을 함께 한 이제훈의 역할도 크다. 필모그래피 쌓는 방식으로도 지탄을 받는 시대가 되었는데, 몇몇 남자 배우들이 논란 가운데 부침을 겪은 올해 이제훈의 필모그래피는 더욱 눈에 띈다. "착한 필모"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그 말은 결코 도덕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시하고 재미없는 선택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영화 속 박열과 민재는 스펙트럼의 정 반대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혀 다른 성향의 인물들이고 이제훈은 그 둘 모두를 생생하게 연기해 냈다. 상대 배우의 비중이 상당히 높고 그들이 더욱 강조되며, 결과적으로도 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 속에서 그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의 단정하고 말끔한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에만 사랑받는 건 아니라는 걸 그는 매번 입증해 낸다.



  영화 속 민재와 옥분은 둘 다 따뜻한 원칙주의자들이다. 원칙주의자가 인간미를 가지려면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해야만 한다. 이 둘은 딱딱한 원칙에 의거해 민원을 제기하고 또 받지만, 원칙대로만 처리하면 된다는 같은 말을 다른 입장에서 하지만, 결코 그 모습은 얄밉거나 딱딱하게 비치지 않는다. 즉 영화 자체가 사랑받아 마땅한 캐릭터들을 내세워 보기가 더욱 편안하다.


  굳이 아쉬운 걸 좀 꼽자면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갈등이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캐릭터만 가지고는 갈등이 발생하기 쉽지 않다 보니 조금 무리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 영화의 경우 두 사람의 갈등이 클라이맥스가 아닌 데다가, 이보다 더 잘 풀어나가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 그냥 납득하게 된다.



  영화는 두 사람 외의 캐릭터들도 많이 담아냈다. 캐릭터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일부 캐릭터는 압축해 표현되어야 해서, 특히 구청장을 비롯한 구청 직원들 캐릭터는 조금 설정이 만화스럽다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튼 각각 확실한 캐릭터 정체성을 갖는다. 인물을 소품처럼 마구잡이로 소비하고 대체한 다른 영화의 논란에 질려 있던 차라 그랬는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 이런 세심함이 반갑다. 흘리는 떡밥은 하나까지 모두 회수하며 그 과정은 별로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조연급 캐릭터들의 스토리가,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도 없는 그들의 스토리가 관객에게 이렇게 잘 전달된 데에는 연출이나 구성 덕도 있겠지만 배우들의 덕도 크다. 구청에 있는 박철민과 정연주, 족발집의 이상희 모두 다른 영화에서 보았던 반가운 얼굴들인데 여기서도 자기 캐릭터로 살아 움직인다.


  나옥분 여사와 구청 직원 박민재를 둘러싼 세계를 탄탄히 구성하는 이런 요소는 영화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옥분 여사가 우리 일상에 같이 사는 할머니라는 느낌을 주는 건 결국 이 덕분이기 때문이다. 배우 한 사람 한 사람, 고심해서 만들어냈을 모든 대사와 구성이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여 만들어낸 느낌이기 때문이다.



  슈퍼를 운영하는 진주댁은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영화를 러프하게 반으로 뚝 갈라 관객을 웃기는 전반부와 울리는 후반부로 나눈다면, 진주댁은 전반부에서도 후반부에서도 눈에 들어온다. 나는 진주댁과 나옥분 여사가 나누는 감정을 보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을 명제처럼 떠올렸다.


  전쟁의 피해자는 사실 남성과 여성 할 것 없이 모두지만, 그래서 같이 분노하고 같이 반대하는 내용이 당연히 대부분이지만, 남성끼리 어깨를 맞잡는 행동 하나, 여성끼리 손을 잡아주는 행동 하나가 각각 갖는 의미가 또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마실 다니며 미주알고주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 평이한 하루하루로 만들어진 감정은 가족 못지않은 끈끈함이 있다.




  사람마다 영화 리뷰를 쓰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는 내가 좋았던 점을 주절주절 친구에게 말하듯 나열한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는 마치 캐릭터 소개집처럼 되어 버려, 쓰면서도 글이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소중하게 지나간 캐릭터 하나하나를 꼭 언급하고 싶었다.


  감독도 이야기하듯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소재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짧게 회상으로 처리되는 장면이 있기는 하나 그 시절은 잘 나오지도 않는다. <귀향>이 그 시절을 보여주는 작업을 주로 했다면 이 영화는 그 시절을 거치고 여태까지 우리 안에 있던 할머님들을 보여준다. 얼마나 평범한 보통 사람인지, 그럼에도 얼마나 위대한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지.


  평범한 소녀였던 할머님들은 다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을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물론 같은 아픔을 가진 다른 여성들을 지원하는 평화나비 기금을 조성하는 등 당당하고 멋지게 세상에 서셨다. 나약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을 겪고도 나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깨워 주셨다. 영화는 나문희와 이제훈, 그리고 다른 훌륭한 배우들을 통해 우리 사는 이 공동체를 담아낸다. 우리는 이제 함께 서 있다.


  다소 착 달라붙지 않는다고 느껴졌던 제목도 영화를 보고 나니 의미 있는 제목이었음이 느껴진다. 대사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던 섬세함은 그런 감동적인 요소뿐 아니라 곳곳에서 깨알 같은 요소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태원에서 영어 공부를 위해 말을 건 외국인 이름은 라이언 고슬링이다. (제작진 중 누가 좋아한 이름일까.) 또 넌지시 고백하는 민재의 원래 꿈은 건축이었어서 이제훈의 전작 <건축학개론>을 떠올리게 된다.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관객 입장에서 (이제훈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미소 지었으니 된 거지.


  그러나 그런 작은 요소 중 작지 않은 요소가 하나 있으니 손숙의 존재감이다. <귀향>에 나왔던 배우 손숙이 여기에도 나와 자연스럽게 동일 소재 영화의 선을 이어 준다. 정확히 같은 역할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얼굴이 반갑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때 스케치도 따고 인터뷰도 따서 완성시켜 가듯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 이야기는 영화 위에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현실이 부디 잘 응답해 주길 바라며, 나도 오늘의 할머님들과 함께 선다. 마침 오늘도 수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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