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Nov 03. 2017

순진함을 깨고 나설 때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2017, 마크 웹 감독)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한 후기입니다. :-)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서 감기도 데려온 계절, 스크린 속 뉴욕에는 토마스라는 남자가 살고 있다. 분명 성인 남자이지만 안경을 끼고 적당히 위축되어 있어 어쩐지 매사가 서툰 소년 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 토마스는 내 거 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여사친' 미미를 마음에 두고 있다.


  자기가 무슨 키팅 선생님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갑자기 나타나 훈수를 놓는 이웃밖에는 딱히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어 거기다가 대고 자기 연애담을 풀어놓으면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하게 된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우울증을 안고 사는 엄마를 생각하며 토마스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일단 불륜부터 시작해서... 점입가경이다.






    포스터 문구에서는 서머가 떠났고 아주 특별한 어텀이 온다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의미로 감독의 전작인 <500일의 서머>와 딱히 이어진다는 느낌은 아니다. 얼핏 보면 토마스가 <500일의 썸머>의 톰의 이미지와 겹치는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하고 초중반만 보면 분명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로맨스에 집중하던 <500일의 썸머>보다 더 넓은 관계망을 담고 있다. 제목도 썸머처럼 착착 달라붙지 않고, 러브라인이 단순하던 썸머에 비해 여기는 더 폭넓은 관계가 연이어 등장한다.


  <500일의 썸머>를 어떤 이유로든 좋아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 영화는 절대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감독이 이 영화를 썸머의 아류작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훅을 날린다. 그리고 그때 뉴욕의 의미도 성큼 다가온다.


  주인공 토마스는 자기 삶이 지루하다고 하지만 그의 삶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는 걸 주변인과의 관계를 통해 알게 된다.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에게 그는 지켜주어야 할 순수, 변하지 않기를 원하는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이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며 그는 변해가고, 영화 초반만 해도 어리숙한 학생처럼 불만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그는 후반부가 되면 제법 단단하게 자기 삶에 만족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썸머를 "희대의 어장관리" 주인공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미미도 조한나도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미는 토마스에게 너는 뉴욕 도시와는 다르다고 계속해서 말해 온다. 조한나도 토마스에게 너는 어리고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른다고 여러 번 이야기한다. 이들에게 대체 뉴욕은 어떤 의미이기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내레이션에서도 뉴욕을 이야기한다. 예술의 자리를 돈이 대체한 도시라고. 그래서 요즘 이곳의 젊은이들에게 예술이란 갤러리에 걸려있는 것이고 사랑도 빗속에서 소리치는 영화 속 장면으로 대체되어 버렸다고. 주인공 토마스도 뉴욕은 영혼이 없다고 하지만 다른 인물들도 그런 뉴욕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토마스의 '뉴욕스럽지 않은' 어떤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 주변에 머무른다. 정작 토마스는 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인데.


  모든 영화가 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대사 하나하나를 앞에서 뿌리면 뒤에서 착실하게 거두어들이는 영화이기 때문에, 대사에 뉴욕이 여러 번 반복되어 등장하는 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미미의 말로는 어른들의 뉴욕과 자기들의 뉴욕이 다르다 한다. 그런 뉴욕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도시라 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많은 일이 일어났을 때 벗어나고 싶지만 빠져나갈 수 없다는 토마스에게 어머니는 그렇다면 유일한 법은 부딪쳐 나가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토마스의 성장 영화다. 이 영화에 썸머가 떠난 자리에는 썸머와는 달리 주인공의 마음을 다 헤아려주고 원하는 대로 옆에 있어주는 여주인공 어텀이 오며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예술의 자리를 돈이 빼앗아 버린 자리에서 여전히 예술을 추구하며,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건 아무리 가벼워 보여도 어떻게든 묵직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뉴욕의 거리를 걷는, 뉴욕에서 살아가는 소년이 있을 뿐이다. 추구해야 할 것을 놓치지 않고, 간직해야 할 의미를 간직하고 있기에 그는 어른이 되어도 '유일한 소년'이다.




  



  과연 내레이션에서 말하는 "예술의 자리를 돈이 대체한" 그 전의 뉴욕은, 그곳에 있던 예술은 돈과 달리 온전히 숭고하고 아름다웠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영화 속 뉴욕에서, 현재에 있는 인물들이 과거의 단추를 풀어내는 장면에서 본다. 어쩌면 어린 시절을 순수하다고 기억하는 우리의 기억이 지극히 어른 중심적인 미화법이듯이, 돈의 논리보다 예술의 논리가 더 짙게 묻어 있으면 더 좋기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미화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내가 그 내레이션을 들으면서 생각한 거리는 홍대였다. 10년 전 필름 카메라가 무거운 줄도 모르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던, 그 시절의 음악을 들으면 지금도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그때 홍대를 나는 막연히 동경했다. 아직 어렸고 집도 멀어서 자주 다니지도 못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좋아했던 카페가 사라진 자리에는 핸드폰 케이스 가게가 생겼다. 오다가다 한 번은 꼭 가봐야지 생각했지만 딱히 가볼 일이 없었던 제과점도 프랜차이즈 카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사람도 너무 많아서 요즘은 홍대에서 만나자고 해도 합정으로, 망원으로, 상수로 마치 홍대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지는 게 일이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밤새 쏘다닐 수도 있겠지만- 그 거리는 변했다. 뉴스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카페 사장님 얼굴에선 씁쓸한 미소나 한숨으로 표현했지만 결국 뜻은 다 같았다. 변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 나는 홍대 거리만큼이나 내 마음도 변했다는 걸 본다. 반짝거리던 막연한 동경, 잘 몰라서 더 좋아 보였던 그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어른이 된다는 건 빨간 머리 앤 말마따나 상상할 수 있는 게 적어진다는 단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순진함과 순수함은 다르다. 순진함은 정말 모르고 어린 거라면 순수함은 알고도 그 맑음을 지키는 것이다. 영화 속 토마스는 순진했고, 토마스가 그 순진함을 안고 살아가기를 모두가 원했지만 그는 기어코 그걸 깨고 나왔다. 그리고 모두의 염려와 관심에 어긋나지 않게, 순수함을 안고 더 성숙해진 얼굴로- 이제는 정말 성인 남자처럼 보이는 얼굴로 뉴욕의 가을 거리를 걷는다. 나는 그저 과거의 순진함을 순수함으로 미화하며 홍대 거리를 걷고 있진 않았는지. 망원동의 그릇 가게들을 기웃거리는 내 시선을 한 번 확인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는 말해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