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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Nov 10. 2017

함께 듣는 빛, 같이 보는 소리

배리어프리 영화제/영화: 소나기(2017, 안재훈 감독)


  작년에 우연히 새로운 이름 하나를 알게 되었다. 배리어프리. 다소 귀에 착 달라붙지 않는 이름 같지만 사실 장벽을 자유로이 뛰어넘는 힘찬 이름이다. 좋아하는 배우(=변요한 님)가 홍보대사를 맡는 바람에 알게 된 거였지만, 배리어프리 영화제 개막식에 막상 가서 앉아있다 보니 정말이지 멋졌다. 행사 분위기는 시종일관 어딘가 훈훈했고, 무엇보다도 배리어프리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멋있었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들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 영화다. 영화 장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장면 스케치나 인물의 행동을 화면 해설로 따로 더빙한다. "툇마루에 가방이 놓여 있다."라든지 "그 뒤로 빛이 반짝이고 있다."든지. 대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막을 까는데, 대사뿐 아니라 현장음이나 배경 음악까지 세세하게 적는다. 오보에 소리, 빗소리, 송아지 울음소리 등등. 그러다 보니 비장애인인 나는 보통 영화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듣고 많은 글을 읽는다. 그래서인지 보통 때라면 그냥 배경처럼 지나쳤을 법한 장면도 하나하나 더 세심하게 보게 된다.


올해로 7회째를 맞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무슨 장면을 그려보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스크린에서 환상 속의 나무들이 보라색, 노란색, 분홍색, 청록색 등 다양한 색깔로 순식간에 자라나는 장면이 있었다. "환상적인 빛"으로 나무들이 피어나고 있다는 문장을 들으며 그 마음마다 각기 다른, 그러나 모두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고 우리가 앉아있는 상영관에는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이 우거졌을 것이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스크린 속의 색채도 아름다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색채는 더 아름다웠다. 함께 듣는 빛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걸, 내 옆 사람을 의식하며 보는 영화가 이렇게 풍성하다는 걸 그렇게 배웠다.


이곳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함께 듣는 빛, 같이 보는 소리들.


  작년에는 배우 김정은 씨의 목소리로 화면해설이 녹음된 <소중한 날의 꿈>이 개막작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귀를 기울이면>이 생각나기도 하는 따뜻하고 순한 이야기였는데, 김정은 씨 특유의 다정한 말투와 따뜻한 목소리가 참 포근해서 더없이 잘 어울려 좋았다. 개막식이 진행되는 내내 훈훈하던 분위기를 개막작에서 그대로 이어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올해는 <소나기>를 보았는데 같은 제작사에서 만든 작품이기도 하고 한국인 서정성의 근원과도 같은 내용이다 보니 마찬가지로 따뜻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소나기 줄거리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황순원의 소나기"라고 누군가 말하면 마치 누가 내 앞에 보라색 꽃잎과 짙은 먹구름, 소나기의 축축한 내음을 가져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주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수줍게 마음을 전하는 그 모든 순간, 소녀와 소년의 싱그럽고 풋풋한 설렘이 전이되어 온다. 그 설렘은 순식간에 그쳐 버리는 소나기처럼 마음을 가득 적시고는 이내 사라져 가서, 다시는 겪지 못할 인생의 한 번뿐인 기억으로 남아 버린다. 그래서 더 애틋한 이 이야기를 우리는 아주 오래 사랑해 왔다. 우리의 클래식이다.


  그 미묘하고 애틋한 정서를 애니메이션으로 어떻게 잘 풀 수 있을까 싶어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애니메이터들이 신경을 무지하게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아주 세심하게 준비된 배경 때문이다. 파란 하늘에 햇살이 직선으로 퍼지는 순간의 따스함, 열매 맺힐 무렵 조금은 시들해진 나뭇잎의 서걱거림, 볕이 들 때 눈부신 은빛을 발하며 보는 이의 말을 잃게 하는 갈대, 푸른빛과 붉은빛이 얼룩덜룩 섞인 가장 맛날 때의 대추... 영화는 가을 시골의 장면을 고스란히 '고증'해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그리지 않았다. 옥수수와 수수가 엉켜 자라는 밭, 적당히 끝이 썩어 거뭇거뭇한 원두막의 지붕,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목화, 물가에서 자라는 부들, 잘 끊기지 않는 칡넝쿨 등. 시골 사람 눈에는 다 보인다.


  아무 풀을 아무 데나 그린 게 아니다. 부들은 물가에만 있다는 걸, 가을 나무가 다 같은 색으로 물들지 않고 울긋불긋 각자 다른 색으로 펼쳐져 가는 양상을, 수수와 옥수수의 영그는 모양새를 정확하게 알고 그렸다. 주인공 소년 소녀의 모습은 소박하리만큼 단출한 반면 배경이 되는 자연은 그야말로 흐드러진다. 적당히 비슷한 꽃으로 처리한 게 아니라 각기 다른 꽃을 모두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극중에서 소녀가 소년에게 그 이름을 물어보면서 소년의 입을 빌어 꽃 이름마저 불러준다. 그렇게 영화는 소녀와 소년이 있는 곳을 우리에게 현실과 최대한 가깝게 데려온다.


  얼핏 생각하면 주인공이 돋보여야 하고 배경이 말 그대로 배경 역할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는 반대로 그렸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눈코 입의, 그래서 돌아서면 잘 기억나지 않는 것 같은 소녀와 소년의 얼굴은 <소나기>를 소설로 읽으며 내가 그린 그림으로 머릿속에 남는다. 어차피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내용보다 그 정서를 생생하게 살리는 게 중요하므로, 읽으면서 상상한 그 어떤 장면보다 생생한 자연을 배경에 고스란히 담아 정서가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 준 것이다. 48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클래식>의 손예진과 조승우가 함께 웃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처럼 애틋함에 젖어들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더빙이 대실패 수준이라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더빙은 사실 성우를 쓰는 게 가장 안전하고 결과도 가장 좋다. 연예인의 유명세는 의외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거 신경 써서 보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토피아>는 더빙이 더 좋다는 입소문을 바짝 탔고, (그래서 나도 더빙으로 봤고) 성우 GV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닐 정도로 성공했다. 설령 백번 양보해 이 작품이 또래 아이의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고 해도, 현장음처럼 들어간 학교 아이들 정도라면 모를까 주인공만큼은 성인 성우가 연기하는 게 언제나 더 낫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성우 김서영 씨 목소리만 들어봐도 바로 알 것이다.


  "어린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라는 말만 들어도 그게 <소나기>의 문장임을 바로 알 만큼 원작 소설이 유명하고 친근하다 보니, 원작의 문장들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대사가 다소 문어적이다. 그건 좋다. 문학이니까. 문학 번역할 때 문장을 함부로 갈라 문장 수를 마구잡이로 바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이기 때문에 꼭 관객들이 가장 친근함을 느끼는 최신의 구어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역할을 맡은 아역 배우들이 '~다'로 끝나는 문장이 대다수인 대사를 구사하기엔 연기력이 모자라다는 점이다. 그들 입장에서도 이 대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을 것 같기는 한데, 결국 '~다'로 끝나는 내레이션 문장을 읽듯 끝을 뚝 떨어뜨리며 맺는 바람에 정말 문자 그대로 국어책 읽기가 되어 버렸다.


  사실 성우가 아닌 이들에게 더빙을 맡기는 게 위험한 이유는 꼭 이들의 연기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다. 애초에 배우들은 목소리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까지 이용해 연기를 전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성우는 목소리만으로 전달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목소리 외의 것을 포함해서 연기를 전달하는 배우들에 비해 목소리에 표현력을 더 실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작품 더빙한 이들은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섬세한 감정건을 다른 문투로 소화할 만큼 연기력이 좋지 못하다. 대사가 많기보다 세수하는 소리, 웃음소리, 놀라는 소리 등도 많은데 어쩜 하나 같이 다 어색하다. 아름다운 배경이 흘러가다가 소년이 세수 한 번 하면 내 감성이 와장창 깨지고, 소녀가 까르르 웃으면 나는 한숨이 나온다. 너무 듬성듬성하게 감성이 전해지는 연기력이라 관객 입장에서 더빙에 대해 인내심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 작품을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보는 호사를 누린 덕에, 배우 변요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린 좋은 문장들이 그 듬성함을 잘 채워주었다. 사실 팬 눈에는 어떻든 다 좋기 때문에 나는 화면해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너무나 훌륭했다. 가을 소나기처럼 서정적이지만 어딘가 서글픈 작품인 데다가 조약돌이나 물장난 등으로 조금씩 마음을 간접적으로 흘려보내는 작품이다 보니 담담한 어투가 작품에 위화감 없이 깊고 진하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더빙이 아쉬워도 너무 아쉽지만, 느릿해서 더 서정적인 이런 감성을 뿜어내는 애니메이션은 분명 귀하다.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 고심해 화면해설 대본을 쓰고, 들리는 대로 적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적어야 가장 도움이 될지 고민해서 자막을 만들고, 그걸 녹음하고 투자하고 이 일을 위해 애쓰며 서로 다독이는 사람들은 더더욱 귀하다.


  올해 7회째인 배리어프리 영화제는 12일 일요일까지 진행된다. <박열>과 <택시 운전사>처럼 올해 한국에서 흥행이나 평이 좋았던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너의 이름은>, <빌리 엘리어트>처럼 누구에게 물어봐도 웬만하면 다 좋다 할 외국 영화, <미라클 벨리에>처럼 배리어프리 취지와도 맞닿는 부분이 있는 영화, <노무현입니다>처럼 시선을 끌었던 작은 영화들과 단편 애니메이션들, 특별 상영작들까지 골고루 상영작을 고른 느낌이 물씬 든다. <소나기>를 변요한의 담담한 목소리로 담아 더 서정적이었다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누구나 사랑하는 수지의 목소리로 담아 더 싱그러울 것 같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상암동에 있어 위치도 나쁘지 않으니까 방문해서 나보다 남을 더 의식하며 영화를 보는 신비하고 풍부한 경험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영화제 기간 상영작은 관람료가 무료에 셔틀도 운행한다.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배리어프리 영화를 위해 다른 방법으로 함께할 수도 있다. 정기후원도 가능하고 '사운드플렉스' 앱으로 배리어프리 영화를 체험하거나 '행복한 소리Dream' 앱으로 목소리 기부도 할 수 있다.


  영화를 혼자 봐도 즐겁지만 함께 보면 더 즐겁다는 것을, '관크'에 지쳐 같이 보는 영화가 싫어져 가는 요즘 더더욱 소중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한 링크

http://www.barrierfreefilm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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