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Nov 19. 2017

상실의 숲에 들어온 빛

영화: 빛나는(2017, 가와세 나오미 감독)

  케이크 이름인 줄로만 알았던 블랙 포레스트가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내 삶과 별 상관도 없는 그 단어가 내게 파동을 남겼다. 나무가 너무 빽빽해 빛이 들지 않는다는 숲. 빛을 한 뼘이라도 더 받기 위해 나무들은 더 가지를 뻗을 것이고, 블랙 포레스트는 점점 더 '블랙'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에 이미 적응한 생물들이 속속 숲에 드러날 것이고 숲은 점점 처음과 다른 모습을 보이겠지. 아마 오랜만에 그 숲을 찾은 사람은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블랙 포레스트는 점점 자기들만의 세계가 되어 갈 것이다.


  상실을 숲이라 한다면 그런 블랙 포레스트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영화는 상실을 전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자 주인공인 미사코는 어떻게 떠나갔는지 전혀 언급되지 않는, 심지어 사진 속에서도 역광에 갇혀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지품을 동전 하나까지 다 줄줄 외울 만큼 그의 빈자리를 더듬고 산다. 배리어프리 영화의 해설 대본을 쓰는 작가로 일하면서 미사코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미지가 아닌 문장으로 담으며 걸어 다니지만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잡지는 못한다. 반면 남자 주인공 나카모리는 잘 나가는 사진작가였지만 시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멎어가는 심장이지만 제 심장이라며 카메라를 붙들고 있는, 서서히 좁아져 가는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



*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 포털에 검색해서 나오는 내용보다는 많은 내용이 들어있는데, 예고편 동영상 정도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해 주세요. :-)




  두 사람은 배리어 프리 영화 해설 대본 작업을 위한 모임에서 만난다. 미사코가 적어온 대본을 읽고 나면 시각 장애인들이 피드백을 하는 방식이다. 영화 전체에서 나카모리가 한 대사보다 더 많은 대사를, 이곳에 앉아있는 아주머니가 한다. 미사코의 대본에 대해 상냥하게 피드백을 하면서도 할 말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말한다. 우리에게 영화란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 공기 안에서 숨 쉬는 일과 같다고. 이 모임의 사람들은 영화라는 것이 누군가 타인의 삶과 이어지는 매개체라고 생각하며, 그 매개체를 가장 좋은 모습으로 다듬고자 이 일을 하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겠지 생각하면 멀리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고가 따스하게 전해져 온다.


  로맨틱 코미디도 아닌데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첫 시작은 좋지 않다. 나카모리의 지적에 미사코가 발끈하는 식이다. 대본 작업 장면은 꽤 여러 번, 긴 시간 동안 나오는데 그동안 미사코는 발끈해서 심한 말을 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대사의 핑퐁으로 애정을 쌓아 올리는 장르도 아닌데 굳이 왜 이런 설정을 넣었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데다가, 후에 더 이야기할 두 사람의 멜로 라인에 별로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 같지도 않다.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건 상실을 천천히 보여주며 관객이 그 안에 들어가게 한다는 점이다. 나카모리의 뿌옇게 변한 시야를 고스란히 체험하는 듯한 시퀀스가 몇 번 있다. 시각을 상실해 가는 그의 시야는 검은색이 아니라 우윳빛으로 물들어 간다. 개중에 어떤 장면들은 나카모리 간접 체험인지 앵글이 너무 흔들리고 초점도 잘 맞추지 않아서 나는 보다가 멀미가 났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잘 알겠지만 비슷한 기법을 쓴 영화를 볼 때마다 멀미가 났던 나로서는 조금 힘들어 참다 참다 결국 눈을 감고 보았다. 눈을 감고 본다니 이상하지만 이 영화는 그래도 되는 영화 같다. 눈을 감고 보니 영화에서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영화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공기 안에서 숨 쉬고 그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아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영화는 <빛나는>이라는 제목에 충실하게 빛이 은은하게 흘러 넘치는 장면들이 많았고, 석양 지는 장면이나 여주인공 뒤로 햇빛이 부서지는 장면 같은 것들은 눈 감고 보아도 빛이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질 만큼 따스했다. 부드러운 빛이 흘러넘치는데 그 안에서 영화는 상실을 이야기한다. 나카모리의 시야, 배리어프리 작업 모임에서 하는 대화, 심지어 그 배리어프리 작업을 하는 극중극 영화, 여자 주인공 미사코의 어머니와 아버지... 영화 곳곳에 상실이 석양빛만큼이나 넘쳐흐른다. 그 부드러운 역설이 더욱 아름다웠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던 영화는, 그 대사 그대로 상실의 빈자리에 촉촉하게 차오르는 무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정점을 이루는 부분이 마지막 대사다.


  마지막 대사는 너무 아름다워서 멀미로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잠시 가슴을 부여잡았다. 결국 마지막 대사를 통해 이 영화 작업을 하면서 미사코가 끈덕지게 고민해 온 것의 답을 찾은 셈이다. 나카모리도 서서히 멀어져 가는 시야에서 가장 밝은 순간을 체험한 것 같다. 그러니 두 사람의 삶에 대한, 그 상실에 대한 영화의 해답은 정말이지 곱디고왔다.



  다만 어째서 굳이 두 사람이 러브 라인을 그려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상실의 감성에 러브 라인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거치적거린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감정선이 너무나 뜬금없다. 로맨스에 집중해서 하나씩 쌓아 올린 감정이 아니라, 곁다리처럼 오락가락하다가 갑자기 차오른다. 두 사람의 상황상 서로에게 인간적으로 끌릴 여지는 있다. 그러나 러브 라인으로 끌고 가려면 훨씬 더 섬세한 장치를 많이 써서 개연성을 부여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것도 없이 너무 갑작스러워 러브 라인이 엉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통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이 차이까지 해서 개연성을 더 떨어뜨린다. 대체 왜 5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어야 했는지? 나카모리 역할을 한 배우는 우리 엄마와 한 살 차이, 미사코 역할을 한 배우는 나와 한 살 차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부녀지간 역할을 해도 무리가 없을 나이 차라는 것이다. 눈을 잘 보여주고 싶어 그랬는지 얼굴 반절만 스크린에 가득 채우는 소위 얼빡샷이 굉장히 많은데, 그 덕에 나이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느껴진다. 깐 달걀처럼 매끈한 여자 배우 얼굴, 주름과 모공에서 세월이 고스란히 보이는 남자 배우 얼굴... 물론 나이듦이 주는 아름다움이 따로 있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매력에 주목한 것 같지도 않다. 설렘은커녕 나는 나카모리가 퉁명스럽게 내뱉는 명령문("먹어!" 같은)이 기분 나빴다. 나카모리 나이의 연륜이 이성적 매력으로 연결되는 듯한 장치도 없어 보였다. 너무 세밀하게 깔아서 내가 못 느낀 걸 수도 있지만... 그럴 바엔 적당한 나이 차이의 배우를 썼다 해도 무리가 없었을 것 같은데.



  

  현실 속의 누군가가 어쩌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그 정도 나이 차라면 그건 그냥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건 문화 시민으로서 남 일에 대해 예의상 하는 소리고, 만약 이게 내 일이 된다면 똑같이 반응할 자신이 없다. 예컨대 혹시라도 내 동생이 아빠 또래의 남자를 데려온다면 오래 전 드라마에서 하유미 씨가 보여주신 교양을 총동원해 뜯어 말릴 것이다. 원래 뭐 상관도 없고 신경도 안 쓰던 문제를 이렇게까지 힘주어 분노하는 데는 올초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에서 발표해서 논란이 되었던 무슨 보고서 때문이 크다.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고 정부 기관에서 보고서를 써서 논란이 되더니만... 그래서인지 요즘 한국 드라마도 띠동갑을 훌쩍 넘는 아저씨와 20대 여성의 연애담을 그려내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 듯하다. 20대 여성인 내 기준으로 주변 반응은 싸하다. 벌써 개연성 없다. 게다가 그런 보고서 이후에 이런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니, 이제 그냥 그런 나이 차이가 러브 라인으로 깔린 작품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영화 시놉시스를 보고서도 그 부분이 제일 꺼림칙했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일본도 그런 보고서 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나 멍하니 하고 있었다. 나온 지 10년은 된 일본 영화 <금발의 초원>에서 어마어마한 연령차를 관객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배우를 어떻게 기용했고 어떤 장치를 썼는지 생각하면, 이 영화가 “나이차를 극복하는 로맨스”라는 어려운 주제를 너무 성의 없이 대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간에 내게 있어서 러브 라인은 이 영화가 "상실에 집중하지 못해서 상실한 그 어떤 것"이다. 인간 관계가 얼마나 다양한 양상이 있는데, 그래서 나이 차이가 있어도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멜로로 눙쳐 버리는 걸까? 설령 미묘한 감정 선이 흐르더라도 무리하지 않고 잘 정리하는 좋은 영화도 있는데. (내가 최근에 본 건 인도 영화 <디어 진대기>의 샤룩 칸이다. 샤룩 칸이 연기한 감정 선은 멋있었다.)


  그래도 눈 감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알려줘서 고맙긴 했다. 마지막 대사는 나카모리뿐 아니라 내 마음에도 잔잔하게 울렸고. 추워지는 계절, 꽃도 잎도 없어지는 나무를 바라보는 이런 날에 상실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늘한 현실, 한국교회 느와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