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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27. 2018

고요히 흐르는 각자의 서사

영화: 허스토리(2018, 민규동 감독)


  처음에 제목을 듣고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히스토리란 His story에서 온 단어라 말하는 주장은 교회에서 무수히 들어왔으며, 사실 역사 기록은 철저히 남성 위주였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여성의 이름이 가려져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허스토리Her-story라는 말의 당위성에는 일견 공감하지만, 무슨 프로젝트 이름도 아니고 영화 제목으로는 조금 뜬금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영어라는 점도 그렇고. 그러나 이 생각은 영화를 보면서 제법 흩어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이 캔 스피크> 때도 그 제목이 영어에다가 길어서 입에 착 붙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가 영화를 보며 사실은 내용상 착 붙는 이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이 역시 <아이 캔 스피크> 때도 생각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어떤 흐름을 보인다. 손에 손 잡은 것처럼, 혹은 계주를 하는 것처럼, 길을 만들어 가는 흐름이 으레 그러하듯이. 다큐멘터리, 극이지만 전체를 기록하는 데에 충실한 영화, 이어 비로소 부분을 잘라 담는 보통의 극 영화 느낌들이 속속 드러난다. <아이 캔 스피크>처럼 <허스토리>도 긴긴 투쟁사의 극적인 한 순간을 담아냈다. 언젠가 소녀상을 둘러싼 이야기도 영화로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다. 소녀상을 지키려 애쓴 한 대학생의 이야기나 소녀상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찧고 빻던 못된 입들의 이야기 같은 것이 담기지 않을까.



  허스토리는 정말 허스토리였다. 할머니 각각이 자신의 입으로 풀어내는 지난 날의 이야기. 허her라는 3인칭 단수로 되어 있지만, 실은 어쩌면 1인칭 단수가 얼마든지 될 수 있었던 일이다. 태어날 시기와 장소, 성별을 골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으니까. 그리고 깊이 들여다볼 것도 없이 엄연히 1인칭 복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라가 머리채 잡혀 이리저리 쿵쿵 부딪히고 다니던 민족의 비극에서, 그 위에 사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꼭 붙잡아 본다한들 무탈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집단의 상처로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결국은 그 안에 있는 개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개인의 상처와 개인의 상처와 개인의 상처... 그리고 그 위에 집단으로서의 무언가가 울컥 얹혀 해결되지 못한 슬픔과 분노로 여전히 남아 있다. 허스토리는 바로 그 지점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시모노세키(통칭 하관)와 부산을 오가면서 수 년간 계속된 재판, 각 도시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관부 재판이라 불린 재판을 속기사 같은 시선으로 기록한다.


  재판장에서 할머니들은 차례차례 입을 연다. 모든 이야기는 구술되며 그 어떤 재연의 장면도 없다. 변호사는 칠판과 법전을 동원해 법률과 법리를 설명한다. 대사가 많은 건 둘째치더라도, 이런 이야기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많을 테니 자칫하면 내용이 지루하다거나 너무 주입식이라는 인상을 줄 위험이 크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좀 더 쉽게 풀어갈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포기하고 대신 재판장 안팎의 느낌을 최대한 오롯이, 사실적으로 담아내려 애쓴 것 같다. 다큐멘터리 기록 영화 느낌은 분명 아니지만, 꼭 그런 기록 영화처럼 촘촘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겁게 담길 수밖에 없는 이야기, 디테일은 다르지만 구조는 같은 이야기가 할머니들 입을 타고 반복되듯 이어짐에도 영화는 제법 박진감을 갖는다.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배우들이 각 캐릭터를 너무나 생생하게 담아낸 덕이 물론 크다. 그러나 김희애 캐릭터의 존재감이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예고편 영상에서 공개된 것처럼 “내가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라고 서슴없이 외치는, 그만큼 자신 있고 당당하며 실제로 힘도 있는 여자. 뜨거운 마음으로 반응하는 멋진 여자. 김준한이 맡은 변호사가 대체로 차분한 목소리로 반응하는 것과 대비되어 더욱 힘을 보여준다.


  성격만 화끈한 게 아니라 그만큼의 능력이 받쳐 주는 여자, 일에 대한 애정을 가득 갖고 있어 워킹맘 특유의 고민을 마음 한쪽에 품고 사는 여자... 어디서 많이 본 여성상이다. <허스토리>의 한 기둥이 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이라면 다른 한 기둥은 현대 여성상이다. 그래서 <허스토리>는 민족에 매몰되는 우를 범할 구석이 없다. 다양한 여성들의 다양한 삶이 구석구석 묻어나 있다. 여러 개의 허스토리가 겹겹이 닿아 만들어진 영화, 수많은 3인칭 단수들이 얽혀서 하나의 서사를 빚어낸 영화다.



  영화 내용은 예고편 동영상에서 나온 것 그대로다. 예고편 동영상은 영화를 정말 너무나 잘 요약해서, 딱히 이 정도 내용을 쓰면서도 스포일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예고편에 그치지 않고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예고편에서 머리로 파악한 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는 또 한 번 도약했다. 마치 할머니들이 피해자 자리에만 있지 않고 마땅한 것들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로, 다른 나라 다른 피해 여성들까지 돌아볼 만큼 지혜롭고 강인한 인권 운동가로 변신해 왔듯이. 거울은 언제나 그 앞에 선 이를 비추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친구와 <레이디 버드>를 보러 가서 영화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수다를 떨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영화의 아류 같은 느낌이 드는, 포스터만 봐도 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지겨운 영화들 이야기를. 연기력으로든 화제성으로든 뒤처질 일 하나 없는 주연 배우들부터, 조연으로 잔뼈가 굵다 못해 온 국민이 사랑하는 조연 배우들까지 싹 다 남자들만 드글드글 나와 조폭이나 법정이나 대기업 같은 곳의 어떤 카르텔을 묘사하고 걸쭉한 욕이나 감춰진 범죄 같은 걸 보여주는 영화들. 그런 영화가 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be fed up”이라는 숙어가 이렇게 더 어울리기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내로라하는 여성 배우들조차 여성 배우의 캐릭터가 너무 한정적이어서 시나리오 선택하기 쉽지 않다는 말을, 여성 배우의 입지가 너무 좁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한다. 누군가의 엄마로만 그려지는 배우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최근 그래도 제목을 떠올릴 수 있는 여성 느와르가 두어 편 있긴 하지만 아직 수적으로 확연히 밀리며, 느와르 말고 다른 장르 영화들도 더 많이 보고 싶다. 남성이 주연인 영화도 사실 마찬가지다. 누가 주연이든 카르텔 짜고 범죄나 뒷골목 같은 거 보여주는 영화는 그쯤 하면 좀 쉬고 다채로운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참 오래 해왔다.


  <허스토리>는 그런 지겨운 영화들과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는 영화다. 주제로 보나 주연 배우들로 보나 풀어가는 방식으로 보나 그러하다. 그래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올라온다. 그러나 이는 이 영화를 “내 새끼”처럼 품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이 영화를 아끼는 마음이다. <허스토리>의 배경이 된 사건을, 그 실제 관련된 이들을, 그리고 그를 영화로 담느라 애쓴 이들을. 비록 그 중 내가 직접 본 건 무대인사 저리에 서 있던 배우들과 감독—즉 영화로 담아낸 이들뿐이었지만 그들만 보아도 확실히 남달랐다.


  무대인사를 자주 가는 편이라고는 못 하겠으나 그래도 어영부영 꽤 여러 번 다녔는데, 그저 애 많이 쓴 사람들 특유의 느낌 같은 것 외엔 크게 감동 받은 적이 없었다. 무대인사가 감동을 주는 자리는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그저 배우와 감독들이 영화를 향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걸, 묵묵히 많은 날 애썼다는 걸, 혹은 그 자리에 몰려 온 팬들에게 고마워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허스토리> 배우들은 차분하고 꽤 길게 많은 이야기를, 말로든 행간으로든 전했다.



  배우 문숙 씨가 한 말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흔히들 위안부 피해자라는 단어에는 “할머니”라는 말이 붙는데, 사실 이 분들도 다 한때는 소녀였으며 할머니가 되신 분들은 살아남으신 분들뿐이라고. 살아남지 못하신 분들이 훨씬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기억해 주십사 부탁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세상 어느 철금성보다 쩌렁쩌렁하게 마음으로 들어왔다. 이 영화를 찍으며 단지 겉모습만 할머니로 분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고민하고 연구한 배우로서의 깊이가 물씬 느껴졌다.


  다소 묵직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극이 너무 가라앉지 않도록 들어 올리는 김희애의 역할이 톡톡한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부산 사투리며 일본어부터 시작해 배우로서 참 큰 도전이었다고 그는 짧게 말했다. 그러나 길지 않은 그 말에서 배우로서든 여자로서든 시민으로서든 여러 도전에 기꺼이 응한 자가 그간 느꼈을 긴장과 뿌듯함, 애정이 얼핏 엿보였다. 단연코 무대인사라는 단어다운, 자부심과 땀방울이 묻어나고 그걸 관객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자리였다.


  이제 <허스토리>가 개봉했다. 영화 크랭크업은 진작에 했을 것이나 진정 허스토리는 이제부터 다시 쓰여야 한다. 진행형의 역사는 언제나 무수한 이들의 발자국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나올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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