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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06. 2018

은막 위의 노래

오래된 영화, 잊을 수 없는 노래들



  노래는 힘이 세다. 시간과 공간이 아무리 우리를 꾸역꾸역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아도 노래는 순식간에 우리를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갈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다. 일례로 나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들을 때마다 초등학교 때 방과 후 영어 수업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순간으로 돌아간다. 당시 선생님은 기분 좋은 추억에 잠기는 사람들이 으레 짓는 그 미소를 지은 채 자기 학생 때를 이야기했다. 학생 때 영어를 배우다가 이 팝송을 처음 배웠는데 반지하 교실이었다, 겨울날 수업에 지쳐 있다가 잠시 듣는 이 노래가 참 좋았는데 때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


  우리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은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춰 나긋나긋한 웃음과 엄한 (그리고 지친) 표정을 오가며 우리를 대했지만, 본인이 예스터데이라는 노래를 처음 배우던 때를 회상하던 그 순간만큼은 눈앞의 초등학생이 아니라 허공 어딘가 본인 눈에만 보이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 미소가 너무나 선명해서 내 머릿속에서도 반지하 교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이 보였다. 흰 듯 뿌연 하늘에서 까만 콘크리트 바닥으로 눈이 떨어지고, 그 회색의 풍경에 어울리게 적당히 쓸쓸한 기타 소리와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풍경. 정작 내가 직접 경험한 일도 아닌데 나는 지금도 비틀스의 예스터데이 전주가 흐르면 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때 선생님은 우리 엄마 또래였는데, 학창 시절 배운 올드팝을 들으면 그 시절이 떠오르는 건 선생님만의 일은 아니었던지 얼마 전 엄마 친구 분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장님이 LP 판을 잔뜩 갖춰 놓은 카페 마당이었고, 손이 많이 간 듯한 정원수 사이에 박혀 있는 스피커에서 쉴 새 없이 올드팝이 나오는 어느 오후였다. “나는 이 노래만 들으면 고등학교 운동장이 생각 나.” 하는 얼굴은 꿈에 젖어 있었다. 누구든 같은 표정을 짓게 하는 노래가 한 곡쯤은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나의 노래, 나만의 기억이 아니라 집단기억을 돌아보게 하는 모두의 노래도 있다. 오 필승 코리아, 아름다운 강산 같은 곡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학교 다닐 때 울며 겨자 먹기로 하던 단체 장기자랑 곡들마저 그렇게 남는다. 그러나 집단기억을 개인의 기억으로 새겨 주는 건 단연 영화 OST가 최고 아닐까. <냉정과 열정 사이> 혹은 <러브 레터>의 OST는 지금도 TV 예능에서 아련한 분위기나 감동적인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종종 나와 음악만으로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이 음악이 나오면 아련한 거야,라고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영화 <클래식>에 쓰인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의 첫 기타 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에서 가로등이 깜빡거린다. 노래는 힘이 세다. 명곡은 힘이 세다. 영화와 합쳐진 명곡은 더욱 힘이 세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1. 블랑쉬 뒤부아의 노래_ It's Only A Paper Moon



  비비안 리 하면 대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먼저 떠오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라 말하는 그 눈이 워낙 강렬하기도 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손에 쥐어 준 유명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비안 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한 번 더 받았는데 두 번째로 받은 작품이 바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이 연극으로 인기를 끌자 영화로도 나온 것으로, 훗날 <대부>로 이름을 날리는 말론 브란도와 함께 출연했다.



 (이 아래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희곡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비비안 리가 맡은 역할 블랑쉬 뒤부아(Blanche Dubois, 불어로 직역하면 “하얀 숲”)는 몰락한 남부 “귀족”의 전형이다. 남부에서 플랜테이션을 하던 대지주가 맞지, 미국에 귀족이란 단어가 웬 말이냐 싶지만 블랑쉬는 정말로 귀족에 가까운 인물이다. 희곡에서는 블랑쉬를 표현하는 데에 delicate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그야말로 딱이다. 블랑쉬는 유약한 인물이다. 잠자리 날개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이 파르르 떨린다. 온통 흰 옷과 장신구로 둘러싼 모습에서 커다란 나방의 날개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블랑쉬가 신경쇠약증을 앓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블랑쉬는 남부 대저택 출신이라 물질로는 더없이 풍족하게 컸지만, 이내 집안이 몰락하면서 가족들의 줄초상까지 치렀다. 블랑쉬의 대사를 유심히 보면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과 남성 형제들 모두 유흥으로 가산을 탕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블랑쉬가 집에서 가족들의 장례를 하나하나 치르며 어떤 꼴을 보았을지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곱지 않은 모습이었을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아직 어렸을 때 만난 남편, 그 청량한 초여름 같았던 사랑은 남편의 자살로 파국을 맞았다. 블랑쉬는 연이어 자신의 삶을 덮쳐 오는 죽음의 가장 추악한 모습들만을 보다가 결국에는 신경쇠약을 앓게 된 것이다.


  그 후로 블랑쉬는 패닉에 빠져 기댈 곳을 찾아 헤맸다. 가족들에게 보고 배운 게 그뿐이었는지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는 게 블랑쉬의 방식이었다. 결국에는 학생과의 관계로 교사 직을 잃었고, 이 사실을 감춘 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동생 스텔라가 결혼해 사는 집을 찾아온다. 전차는 묘지를 지나 엘리시안 필드, 즉 신화에서 전사들이 잠드는 정토의 이름을 한 정거장으로 블랑쉬를 데려다준다. 휴식을 찾아, 구원을 찾아 멀리까지 온 블랑쉬는 필사적으로 과거를 숨기며 허언증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스텔라는 언니를 보듬으려 애쓰지만 그 남편인 스탠리는 술과 폭력과 육체로 이루어진 단순한 사람이라 블랑쉬의 “귀족적” 정서며 석연찮은 구석들 하나하나가 죄다 고깝다. 그는 자신이 포커를 치며 앉아있는 방 벽 색깔만큼이나 원색적인 인물이며, 블랑쉬의 새하얀 세계를 경멸한다.



  스탠리와 포커를 치러 집에 드나들던 친구가 블랑쉬에게 구애하고, 블랑쉬는 꿈꾸던 구원을 그에게서 찾으려 기대한다. 그러나 블랑쉬의 과거를 알게 된 친구가 물러나면서 블랑쉬의 기대는 좌절되었다. 스텔라가 아이를 낳으러 가느라 집을 비운 사이 스탠리는 블랑쉬를 강간하고, 결국 블랑쉬의 유약한 세계가 무너진다. 스탠리와 스텔라 부부는 블랑쉬를 정신병원으로 보내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블랑쉬는 바다와 젊은 의사와 하얀 가방, 여름날의 정오 같은 단어들을 통해 깨끗하고 맑았던 순간들을 그리워하며 멀어져 간다. 블랑쉬가 멍하니 “난 항상 낯선 이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말을 남기고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대학교 다닐 때 영문학 수업에서 이 희곡을 같이 읽고 감상을 나눈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의외로 블랑쉬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마냥 사랑스러운 캐릭터도 아니고 불편한 성정이 맞는데, 단어 하나하나 고민하면서 몇 주 동안 읽느라 정이 들었던가. 스탠리가 가장 고까워하는 블랑쉬의 거짓말들이며 과거에 저지른 비행은 뭐 현실 인물이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배경만 읽어도 빤한 스텔라네 집에서 하인이 없냐는 둥 묻는 남부 귀족의 풍모는 좀 얄미울 법도 한데... 그럼에도 블랑쉬라는 캐릭터가 영 밉지 않다는 쪽으로 입이 모인 건 블랑쉬가 그 현실에서 도망칠 곳을 환상밖에 알지 못해서 그랬지 나름 가련한 면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블랑쉬는 뉴올리언스로 오면서 죽은 전 남편의 편지를 모두 가지고 왔다. 죽은 전 남편의 기억은 어둠 속의 새하얀 빛으로 블랑쉬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블랑쉬가 꿈꾸는 구원의 이상향을 닮아 있기도 하고 블랑쉬가 과거를 생각하면서 갖는 죄책감을 더 무겁게 하기도 한다. 빛으로 가기 위해, 어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블랑쉬는 필사적으로 과거를 덮고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흰 옷으로 자신을 감싼다. 미쳐 버리고 나서도 포도를 씻을 정도로 씻는다는 행위에 집착하며, 극 중에서도 계속 목욕을 한다. 그리고 목욕을 할 때마다 It's Only A Paper Moon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Say it is only a paper moon
Sailing over a cardboard sea
But it wouldn't be make 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종이로 만든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종이 달이라고 해 보자
그렇다 해도 네가 날 믿는다면 이건 가짜가 아니야

Yes, it's only a canvas sky
Hangin' over a muslin tree
But it wouldn't be make 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그래, 그냥 캔버스 위에 그린 하늘일 뿐이야
모슬린 천 위에 그린 나무 위에 걸려 있는 하늘이지
그렇다 해도 네가 날 믿는다면 이건 가짜가 아니야

Without your love
It's a honky tonk parade
Without your love
It's a melody played in a penny arcade
네 사랑이 없이는 이건 그냥 싸구려 퍼레이드일 뿐
네 사랑 없이는 그저 허름한 장터에 울려 퍼지는 노래일 뿐

It's a Barnum and Bailey world
Just as phony as it can be
But it wouldn't be make 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겉치레 투성이인 서커스 같은 세상
그렇다 해도 네가 날 믿는다면 이건 가짜가 아니야


  이 노래는 1930년대에 세상에 나왔지만 그 후로 숱하게 리메이크된 곡이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희곡을 집필할 무렵에도 엘라 피츠제럴드라는 가수의 목소리로 다시 나온 참이었다. 당시 연극 무대에 올라갈 때에는 오늘날의 멜론 탑 100 정도 될 유행곡이었으므로, 관객 입장에서는 당대의 노래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입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노래는 블랑쉬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음울한 현실을 피해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 믿기만 한다면 가짜도 아닌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 블랑쉬가 삶에 대해 보여 온 태도를 잘 보여 주는 노래다. 서커스 같은 세상이라도 블랑쉬를 잡아 줄 누군가의 사랑이 있었더라면 블랑쉬의 환상은 순식간에 장면을 바꿔 마치 발리우드 영화 엔딩처럼 되었을지도.



2. 도로시의 노래_ Over the Rainbow



  유명하다는 말도 식상한 명곡이다. <오즈의 마법사> 영화는 1939년에 나왔고 그 후로 지난 무수한 세월만큼이나 무수한 이야기를 남겼다. 애초에 <오즈의 마법사>라는 작품 자체가 단순한 동화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 간추린 버전으로 대충 읽고 환상적인 느낌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금본위제와 은본위제를 두루 담아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논하는 글이기도 했다. 어쩌면 세상 많은 일들이 다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 환상에 차서 바라보았던 것들이 알고 보면 굉장히 현실에서 나온 것이어서 내가 알던 바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곤 한다.


  대부분이 그런 일들이어서인지 아니면 오즈의 세계가 우연히 다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오즈의 마법사> 영화 또한 알고 보면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최악의 현실이었다. 스크린 안에서는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거니는 도로시의 도움으로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가 각각 필요한 것을 얻게 되지만, 카메라 밖에서는 이 성인 남성 배우들 모두가 주연 맡은 어린 여자배우를 질투해 괴롭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담배를 몇십 개피 피우게 했다든지 마약을 먹였다든지 하는 일화는 거의 인터넷 괴담이라고 치부될 만큼 끔찍하지만 주디 갈란드의 잔혹사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주디 갈란드의 길에 비하면 극 중 도로시의 길은 문자 그대로 황금 길이었다. 주디 갈란드의 삶에는 황금색 길도 은빛 구두도 놓여있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들어섰는데, 당시 할리우드에 만연했던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 줄 이가 없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 눈에 주디는 딸이라기보다 본인이 할리우드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 줄 욕망의 대체재였다. 끔찍한 표현이지만 오늘날 활동하는 배우들까지 포함해서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꽤 많다. 주디는 당대 유행하던 "핀업 걸 스타일"이 아니었고, 이런 주디를 어디에라도 꽂아 넣어 성공시키기 위해 주디의 어머니는 아이를 약물이나 성 접대 자리로 내몰았다.


  감독들이 성 접대를 받는 일이나 배우에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시킨다는 명목으로 약물을 사용하는 일 등 끔찍한 일들이 관행이란 이름하에 당시 할리우드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현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촬영장에서 정상적인 청소년에게 권장되는 규칙적인 수면 시간을 보장받기는 어려웠다 하더라도, 촬영 내내 약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게끔 되어 있었다는 건 분명 비정상이다. 배우의 몸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약을 쓴 데다가, 촬영장의 대부분이 주디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분명 해 줄 수 있는 스케줄 조정도 해주지 않았을 공산이 무척 크다. 촬영장에서 주디에게 다정하게 대해준 건 서쪽의 나쁜 마녀 역할을 맡은 마가렛 해밀턴 뿐이었다는 말을 듣고 있다 보면, 도로시를 둘러싼 오즈의 세계가 얼마나 허울뿐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도로시의 세계를 벗어나서도 주디 갈란드는 황금 길을 찾지 못했다. 소속사와 주디의 어머니, 영화계 인물들은 계속해서 주디를 약물에 절여 놓았다. 숫제 사람이 아니라 물건 취급이나 다름없었다. 미성년자 때 성 접대 자리에 끌려가면서 스스로의 몸에 대해 주체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주디는 계속해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한평생 그렇게 가혹한 학대만을 받아 본 사람의 삶이 어떻게 정상적일 수 있을까. 임신과 낙태, 신경쇠약, 약물과 알코올 중독, 자살 시도 등으로 점철된 주디의 20대는 한없이 불안정했다. 그러나 스크린 위의 주디는 또 다른 존재여서, 주디가 출연한 영화는 흥행의 연속이었다. 주디는 누가 봐도 쉼이 필요한 존재였지만 소속사는 주디의 내면이 아무리 덜그럭거려도 죽어라 끌고 다니기 바빴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단물을 뽑아 먹을 만큼 뽑아 먹은 후에야 소속사는 주디를 놓아주었다. 그 후 주디는 어머니와도 멀어진다.


  영화를 떠났어도 주디는 여전히 건재한 스타였다. 무대에도 오르고 텔레비전 쇼에도 출연했으며 음반도 냈다. 공적인 세계에서 주디는 더없이 강력했지만 무대 뒤 본인의 일상은 어린 시절부터 허물어진 상태 그대로였다.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자체는 그럴 수 있는 일이라지만, 남편의 동성애로 인한 원치 않았던 파국을 맞았다든지 각각의 삶에 있었던 여러 중독으로 결국 서로를 끌어안지 못했다든지 하는 세세한 내막을 듣고 있노라면 그냥 그럴 수 있다고만 말할 일은 아니어 보인다. 심지어 남편과 사위가 눈 맞아 도망가는 상황마저 맞닥뜨렸다.


  알코올과 약물 중독은 더욱 심해져 갔다. 어린 시절부터 주디를 이용하기 편하도록 주디의 몸에 약물을 밀어 넣은 이들은 주디의 마음에도 그 못지않게 해로운 것들을 주입했다. 주디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병들고 지친 상태였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으니 타인이 주는 환호 소리가 마음에 건강한 자존감으로 쌓일 리 없었다. 평생을 애정 결핍에 허덕였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들 중에는 주디에게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들 모두가 주디를 사랑으로만 대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주디의 몸은 타인의 사랑보다 약물에 더 익숙했다.


  결코 정상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주디는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이 곳곳에서 풍긴다. 무대 위에서, 스크린 위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주디 자체가 그 증거다. 주디는 그동안의 자신을 다 때려치우고 떠나서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길은 결코 택할 수 없던 사람이었다. 그 불안정한 와중에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노래하고 연기하며 무대에 올랐다. 애초에 자기가 걷던 길을 떠나는 방법을 배워 보지 못한 존재라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속사와 결별한 후 어머니와 남남이 된 걸 보면 주디도 나름대로 자기 삶을 불우하게 만드는 원천을 제게서 꺾어내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오랜 세월 학대당한 사람이 그 학대로부터 벗어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면, 어머니와 남남이 되었다는 그 짧은 문장 뒤에서 주디가 겪었을 다면적인 감정들이 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그런 주디 갈란드를 이미 알아버린 지금, Over the Rainbow의 가사를 보면 아름다운 시어로 이루어진 가사 어딘가 서글픔이 느껴진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무지개 너머 저기 높은 곳 어딘가
옛날 자장가에서 들어 본 곳이 있어요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무지개 너머 저기 어딘가 하늘이 푸른 곳
감히 품었던 꿈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곳

Some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언젠가 나는 별에 소원을 빌고 그곳에서 눈을 뜰 거예요
구름은 저 멀리 아래에 있고
괴로움은 레몬 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곳
굴뚝 위 한참 높은 곳
거기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무지개 너머 저기 어딘가 파랑새가 날아다니는 곳
새들은 무지개를 넘어 날아가는데
왜 나는 그럴 수 없을까요?

If happy little bluebirds fly
Beyond the rainbow.
Why, oh, why can't I?
행복한 작은 파랑새들이
무지개 너머 날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럴 수 없는 걸까요?


  영화 속 도로시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매우 초반이다. 동네 사람이 강아지 토토를 때린 일로 상심하는데 아무도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이에겐 너무나 큰 일이지만 어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어서, "그런 작은 일"로 속상해하는 도로시에게 이모가 쏘아붙인 후였다. 그런 작은 일도 벌어지지 않는 세상 따윈 없다는 걸, 세상엔 너무 많은 일이 너무 끔찍하게 쏟아지고 있다는 걸 아는 어른들은 이따금 아이의 마음 아파하는 일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야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겠냐는 말들도 심심찮게 한다. 그러나 누군들 유토피아를 꿈꿔 본 적 없을까.


  유토피아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과감하게 품었던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지는 곳은 없더라도 그 날 그 날 분의 괴로움을 레몬 사탕처럼 녹여줄 수는 있었을 텐데. 위로받기엔 너무나 작고 내밀했던 어린 날 베갯머리의 슬픔부터 세상이 기함할 만큼 잔혹했던 누군가의 괴로움까지, 무지개 너머 저기 어딘가에서는 위로의 음악이 아직까지 흘러나온다.




3. 오드리 헵번의 노래_Moon River


  오드리 헵번처럼 자기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하고 떠난 배우가 몇이나 될까. 블랙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 차림으로 티파니 매장 앞에 서 있는 모습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지 않은 사람들 눈에도 선할 것이다. 나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보여준 일라이자 연기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작품으로서는 <로마의 휴일>이 더 유명한 것 같기도 하지만, 오드리 헵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시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홀리다. 홀리는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래로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 <티파니에서 아침을> 또한 남자 주연 배우가 누구였는지 생각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 시네필들이라면 어려움을 겪지 않겠지만 나 같이 오드리 헵번 정도나 겨우 아는 사람의 인식이란 으레 오드리 헵번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만 한참을 미적거리니까. 그러나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조지 페퍼드가 분한 폴이 이사를 오면서 시작된다. 폴은 이제 막 첫 발을 떼는 작가지만 부유한 기혼자 애인 덕분에 애완 고양이처럼 기품 있어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다.


  폴과 다른 의미로 고양이처럼 팔짝팔짝 뛰어다니고 있는 인물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홀리다. 홀리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처럼,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인원을 불러 엄청난 파티를 열기도 하고, 폴이 자기 동생 프레드랑 닮았다며 멀쩡한 남의 이름을 바꿔 부르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사는 홀리의 아파트는 주거 공간이라기보다 쇼룸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과 실제가 너무나 다른 삶. 생활 패턴이랄 것도 엉성하지만 가끔 그 패턴이 주변에 폐가 될 때면 한 번 싱그럽게 웃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별생각 없어 보이는 홀리에게도 뚜렷한 목표는 있다. 돈 많은 남자를 찾아 결혼함으로 안정된 신분을 갖는 것.



  어떻게 보면 닮은 듯한 두 사람이다. 적당한 사회 품위는 유지하고 싶지만,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 번듯하지만, 사실 혼자 힘으로 그럴 수는 없어 다른 이에게 기대는 것으로 방법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그러나 철저히 본인만 책임지면 되는 폴과는 달리 홀리에게는 지워내고 싶은 과거가 있다. 과거가 좀 해결되나 싶으면 미래가 막힌다. 심부름 삼아 다니던 일이 마약 조직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이 순진한 아가씨만 몰랐다는 게 밝혀지면서 기대해 봄직했던 상대와의 관계도 끝나고 만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폴은 차츰 홀리를 사랑하게 되고 애인과의 관계도 정리한다. 진정한 것보다는 겉치레가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던 두 사람이 각각 자기의 허황된 것들을 접고 사랑으로 돌아서는 과정을 영화는 천천히 보여준다.



  미의 기준의 정석 같은 주인공 외모부터 홀리의 아파트, 비 오는 거리까지... 영화는 사실 비주얼로도 많은 걸 충족시켜 주지만 사실 영화에서 진짜 말하고 싶은 건 고전적인 주제, 진짜 사랑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 비싸고 귀한 것들이 좋아도 결국 진짜 중요한 건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를 데려다가 한다. 그래도 설득력이 있으니 수십 년이 지나도 이 영화가 명화로 빛이 나는 것이겠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비주얼 못지않게 뇌리에 오래 남는 것이 음악이다.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달 가는 강, 아주 넓은 강
언젠가 멋지게 강을 넘어갈 거야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꿈을 주는 사람, 마음을 아프게도 하는 사람인 너
네가 어디로 가든지 그 길로 나는 갈 거야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방랑자 둘이 세상을 보려고 떠났지
세상에는 볼 게 너무나도 많아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waitin' 'round the bend
우리는 같은 무지개 끝을 따라가고 있지, 모퉁이를 돌기를 기다리며

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
다정하고 좋은 친구, 달 가는 강, 그리고 나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보석 같은 눈을 깜빡이던 홀리가 고요한 밤에 수수한 차림으로 창가에 앉아 부르는 노래다. 마치 홀리의 맨 얼굴이나 일기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볼 게 너무나 많았던 요지경 같은 세상으로 떠난 홀리, 무지개처럼 잡히지 않을 것을 따라가며 오지 않을 모퉁이 길을 끊임없이 기대하고 기다린 홀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기 고양이만큼이나 길 잃어버린 천방지축처럼 살았지만 사실 홀리의 마음속에 있던 기대는 다름 아닌 따뜻한 마음이었음을 너무나 다정한 노래로 드러냈다.


  



  그냥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노래,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훨씬 많은 노래를 생각 나는 순서대로 쭉 적었을 뿐인데 제목이 다 하늘에 있다. 달과 하늘이나 무지개의 이미지가 곡마다 있다. 원치 않는 결혼에서 도망친 홀리든지 결혼으로 도망치고자 했던 블랑쉬든지, 세상 아무도 몰라주지만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슬퍼했던 도로시라든지, 제각각 슬픔과 외로움은 다른 이유로 찾아왔지만 이럴 때 감정의 결이란 다 비슷한 것 같다. 슬프면 슬프지 않기를, 괴로우면 괴로움이 멎기를, 외로우면 누군가와 따스한 마음을 나누기를 바라는 게 보통의 사람 마음이니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순간을 하늘에 빗대며 부른 노래들이 잊히지 않고 사랑받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이니까. 위로의 노래는 여전히 은막을 빛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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